미스터리 포켓

사건의 범인은 당신입니까?

2023-12-22
1313

만 14세 이상 | 1~6명 | 60분
 
"사건의 범인은 당신입니까?"
 
보드게임 카페 같은 곳에 가보면 크게 두 부류의 테이블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시종일관 시끄럽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테이블. 또 하나는 말없이 게임판을 노려보며 다음 수를 어떻게 둘지 심각하게 고민 중인 테이블. 이 두 가지 유형의 차이는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특성보다는 플레이하는 게임의 특성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전자의 테이블은 특별한 고민 없이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파티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테이블은 아마도 상대를 이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전략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보이는 풍경이 이렇게 상반되듯이, 파티 게임과 전략 게임은 서로 상대되는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지략을 짜내면서도, 시종일관 웃고 떠들며 플레이하게 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임도 있다. 계산과 논리적 추론이라는 개인의 영역에서부터 설득과 토론,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읽고 회유하기도 해야 하는 이 게임에는, 전략과 고뇌가, 웃음과 대화가 넘친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게임이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분위기를 표현한 사진. 많은 인원이 충분히 넓은 장소에서 설정에 맞는 차림을 하고 플레이하는 것이 기본형으로 여겨진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는 이름은 20세기 초중반, 영미권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일종의 미스터리 파티에서 비롯되었다. 본래는 특정한 유형의 파티를 이르는 말이었지 게임을 뜻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더 미스터리 파티라는 이름으로 개최되는 파티에서는 으레 특정한 유형의 게임이 벌어졌기에, 유사한 종류의 파티나 그 파티에서 진행하는 게임 방식을 총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말 그대로 살인사건 가장 파티다. 20세기 초의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기본적으로 가상의 살인사건을 주제로 역할 놀이를 하는 사교 파티였는데, 각자 정해진 배역을 맡아 자유롭게 파티를 즐기면서 단서를 찾아내고, 각자 범인을 추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살인사건 가장 파티라니 참 험악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야말로 절묘한 사교 행사였다. 참석자 모두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하다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전혀 주저되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교 자체를 위해 억지로 대화를 붙이고 이어 나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데다, 상대의 말 한마디, 작은 단서 하나에 신경 쓰며 추리에 골몰하다 보니 분위기가 느슨해질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20세기 초중반은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을 위시해서 온갖 거장들이 활약하던 추리소설의 황금기였기에 유행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하룻밤에서 이틀, 길게는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기도 하지만, 저녁식사를 겸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시나리오들도 있다. 이 경우에는 별도로 머더 미스터리 디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 파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간단하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 보니 파티에 초대받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다. 당신의 우편함에 어느 날 하나의 초대장이 꽂혀있다. 초대장을 열어보니 “A Murder is Announced(‘살인을 예고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1950년 작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이 소설의 발표 이후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초대장 문구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파티가 열리는 일자와 장소가 쓰여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이 그 파티에서 맡게 될 캐릭터와 드레스코드, 그리고 당신이 맡은 캐릭터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에 대한 대본이 들어있기도 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가가 1950년에 발표한 소설 '살인을 예고합니다'
 
파티 당일, 당신은 드레스코드에 따라 담당 캐릭터로 분장하고 파티장에 간다. 파티장에는 적게는 6~10명, 많게는 20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모여있다. 이 사람들 모두 당신과 같은 초대장을 받았고, 저마다 담당하는 캐릭터가 하나씩 있다. 이제 파티를 주최한 사람, 혹은 사회자가 등장해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린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과 함께 간단한 질문 답변이 이어진다. 그 후 사회자는 선언한다. 범인도, 그 범인을 찾기 위한 단서도 모두 이 파티장 안에 있다고. 당신은 이제 자유롭게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용의자의 증언이다. 당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상대가 누구인지, 무엇을 목격했고 무엇을 했는지 묻기 시작한다. 그렇게 단서를 수집하다가, 파티가 끝나갈 무렵 범인을 지목한다.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이런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다시 사회자가 등장해 진짜 범인이 누구였는지,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발표한다. 그러고 나면 그날 파티에서 가장 뛰어난 추리를 해낸 최고의 탐정을 뽑아 상을 수여한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으며 모두가 탐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이 더 많을수록 더 복잡한 사건을 아주 스릴 있게 꾸며낼 수 있으며, 타인의 추리를 엿보며 자신의 추리를 수정해 나갈 수도 있기에 분위기를 따라잡지 못해 게임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적다.
 

가장 오래된 머더 미스터리 전문 회사로 알려진 레드 해링(훈제 연어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거나 시선을 분산시키는 단서를 가리킨다) 게임즈에서 판매중인 머더 미스터리 키트
 
초기의 머더 미스터리 파티는 대개 파티를 모집하는 호스트가 직접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사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준비되었지만, 1980년대를 전후해 박스 형태의 머더 미스터리 파티 키트가 등장하면서 상업적인 분화가 이루어졌다. 머더 미스터리 시나리오를 만드는 전문 회사에서 키트를 만들고, 주최자는 키트에 들어있는 시나리오를 사서 그 시나리오에 따라 파티를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컴퓨터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고 PC 통신이 등장하면서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시나리오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만 이것은 아직 세계적인 문화라기보다는 파티 문화에 익숙한 영미권에 한정된 것이었다.
 

국내 자체개발 머더 미스터리 파티 게임인 <서스펙트 게임> 시리즈. 게임 인원이 3명, 4명으로 압축되어 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가 점진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일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방 탈출 카페의 성공이다. 같은 시나리오의 고정된 일회성 파티 장소를 대여하는 업종이 상업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게 되자,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체험을 제공하는 매장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이런 매장들이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 의외로 중국이었다. 두 번째로, 좀 더 작은 파티를 위한 개선들이 계속된 점이다. 더 적은 수의 인원으로, 더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점점 많이 개발되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을 경과하면서 전문기업들이 아예 언택트 머더 미스터리 파티를 위한 플랫폼을 개발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도 연관이 있는 변화인데, 바로 보드게임 업계의 참전이다. 상업 머더 미스터리 파티가 점점 규모의 간소화를 추구한 결과 이미 보드게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장르에 가까워졌지만, 보드게임 시장에서는 그보다 더 보드게임의 문법에 가까운 상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오직 카드만으로, 테이블 위에서만 플레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소한 6~8인 이상의 플레이어를 요구하던 기존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불문율을 깨고 5~6인, 4인, 3인까지 플레이어를 줄이기도 했다. 이런 변화들이 결국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재부흥을 가져왔는데, 영미권이 중심이던 첫 유행과 달리 비 영미권에서 좀 더 넓게 퍼지게 되었다.
 

상하이의 극본살 스튜디오(왼쪽)와 서스펙트 게임 중국어판(오른쪽) 서스펙트 게임의 중국어 제목 위에 ‘모살지미’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여러 나라에서 유행이 시작된 만큼 머더 미스터리라는 이름도 여러 이름으로 다르게 불렸는데, 중국에서는 모살지미(謀殺之謎; 머더 미스터리의 직역에 가깝다.) 혹은 극본살(劇本殺)이라 불리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머더 파티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미스터리 포켓>의 원제도 실은 <머더 파티 포켓>이다.
 

미스터리 포켓
 
이 게임에는 규칙서가 없다. 규칙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다. 대신 게임을 시작할 때 전용 앱을 스마트 기기에 설치해 두어야 하며, 앱의 지시에 따라 게임이 진행된다. 단계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앱이 친절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플레이가 상당히 간편하다. 전통적인 머더 미스터리 파티에서의 사회자 역할을 앱이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게임은 1명에서 6명까지 플레이할 수 있는데, 인원수에 따라서 게임의 플레이 양상이 달라진다. 1~2명일 경우엔 추리에만 집중할 수 있고, 인원이 많아질수록 역할극의 비중이 커진다. 정통에 가까운 머더 미스터리 파티를 맛보고 싶다면 되도록 많은 인원으로 하는 것을 추천한다.
앱의 안내에 따라 준비가 끝나면, 플레이어들은 1930년대의 나폴리로 떠나게 된다. 파시즘의 열기와 시대적 혼란이 음울하게 꿈틀거리는 이 땅에서, 플레이어들이 마주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살인 사건이다. 나폴리의 한 극장,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은 매표소 안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여러분은 용의자이자 탐정으로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내야 한다.
 

1930년대 나폴리로 떠나자.
 
진상을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화와 관찰, 논리적 추론이다. 모두가 용의자인 만큼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을 굳이 나서서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서로에게 질문하고 추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앱의 안내에 따라 새로운 단서들이 드러나고, 플레이어들은 새롭게 드러난 진실에 따라 여러 차례 자신의 추리를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장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토의를 통해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지 맞히는 것만으로는 승리에 다가갈 수 없다. 사건의 진상에 좀 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접근해야 하며, 이러한 추리의 검증은 게임의 마지막 단계에서 앱이 제시하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질문들은 게임 전이나 도중에 미리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시험공부 하듯이 답을 찾으려 들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전체적인 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추리소설에서 으레 탐정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미스터리 포켓: 막이 내리다>는 최근 몇 년간 범람하기 시작한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보드게임 버전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앱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정통과 거리가 먼 변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앱의 존재로 인해 다른 어떤 보드게임보다도 전통적인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스타일이 충실히 구현된다. 대다수의 게임들이 사회자를 빼고 어떻게 게임을 꾸릴 것인가에 골몰할 때, 이 게임은 사회자를 앱 속에 집어넣는 선택을 했다.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지만, 이 선택으로 머더 미스터리 파티 본연의 맛을 살려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자가 없는 게임에서는 결국 규칙서의 숙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게임의 진행 흐름을 미리 파악하고 게임을 하게 된다. 새로운 국면이나 흐름의 뒤틀림 등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사용되는, 보는 이를 뒤흔드는 전환을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중간에 공개되는 추가 규칙서나, 나중에 등장하는 스토리 카드 등으로 어느 정도 소극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흉내 수준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규칙서 없이 앱의 가이드에 따른 순차적 진행은 게임을 변칙적으로 플레이하려는 시도를 막아준다. 기존 보드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 중 가끔 게임의 스토리를 도외시하고 게임의 시스템을 분석하여 승리 조건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물론 이런 시도는 대개 미스터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태도는 게임 전체의 풍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게임의 전체적인 구조를 미리 보여주지도 않고 승리를 위해 무엇을 답해야 하는지도 미리 밝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하는 플레이어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앱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아이디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주 간단한 결정일 뿐이지만, 이 결정 하나가 게임에 가져다준 영향은 크다.
 
사건과 추리라는, 추리 게임에서 핵심이 되는 플롯 부분에서도 완성도가 뛰어나다. 지나치게 전문적이거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단서가 서로 얽히면서 진상을 드러내는 짜임새가 좋다. 유쾌한 대화와 떠들썩한 분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게임이지만 그 서사의 바닥에 깔려있는 음울한 하드보일드적 분위기,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가 얽히면서 감정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스토리텔링도 여느 게임에서 만나기 힘든 완성도를 보여준다. 
 

2021년 이탈리아 TV 시리즈 '수사관 리치아르디'
 
사실 이 게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애초에 플롯 자체를 미스터리 전문가가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게임의 시나리오를 만든 마우리치오 드 조반니는 이탈리아의 범죄 소설가로, 이 게임은 그의 유명작인 <수사관 리치아르디 시리즈>의 연속선상에 있다. 리치아르디 시리즈는 유럽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TV드라마나 만화 등으로 계속 영역을 넓혀왔는데, 이 <미스터리 포켓> 시리즈(물론 아직 <막이 내리다> 하나밖에 출시되지 않았지만)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게임이다. 1930년대라는 미스터리의 황금기, 그리고 그 시기 파시즘이 폭발적으로 태동한 나폴리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시대와 흔들리는 개인을 담아낸 이 시리즈에는, 전통적인 영미식 미스터리의 구조와 비영미식 문학적 추리 소설(조르주 심농의 ‘경감 메그레 시리즈’로 대표되는)의 풍미가 묘하게 잘 어우러져 살아있다. 여기에 20세기 하드보일드의 스타일과 현대적인 특수설정 미스터리(판타지/호러 속성이 섞여 있거나 초능력이 등장하는 등의 미스터리 장르. 이 게임의 주인공 리치아르디에게는 어떤 특수능력이 있다.)의 경향도 반영되어 있다. 머더 미스터리 파티의 태동 후 100년간 진화한 미스터리 장르의 수많은 얼굴들이 이 작은 게임 하나에 모여 들어있는 셈이다.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이 화려한 내용물이 반갑기 그지없을 것이고, 미스터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깊고 화려한 분위기의 향연에 정신 차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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