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오트의 선택 - 윙스팬

새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다고요? 여기 새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게임이 있습니다.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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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20대까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30대 즈음부터는 보드게임 업계에 종사하며 20여 년간 덕업일치의 외길을 걸어왔다. 박지원이란 이름보다는 가이오트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보드게이머. 그의 반쯤은 사사로운 보드게임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다고요? 여기 새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게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보호구역 안에 새를 모아 보세요."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능력개발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괴수공룡백과>라는 책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잡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 책은 당시 정가가 1000원이었는데 1000원짜리 치고는 정말 알찬 내용이 담겨 있는 환상적인 책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공룡이든 곤충이든 크툴루 신화든 두걸 딕슨의 미래 동물 예측이든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요괴 도감이든 나는 도감 형태로 만들어진 책을 꽤 즐긴다. 나는 새를 좋아한다. 나에게 새는 어린 시절 공룡에 대한 호기심과 이어져 있다. KT대멸종을 견딘 지배 파충류에는 수각류 공룡의 후예인 새 말고도 악어와 거북이 있으나 악어나 거북보다는 아무래도 새가 흥미롭다.
 

1980년대에 발매된 괴수공룡백과
 
지금 현재 나는 좀 덜 번화한 곳에 산다. 번화한 곳에서는 볼 수 있는 새라고 해봐야 까치와 비둘기가 전부이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여름이면 아침 6시쯤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버스 정류장 너머에 목과 다리가 긴 물새가 보이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이제 번화가에서는 보기 힘든 참새도 이 동네에는 제법 있다. 직박구리 같은 새는 출근 길에도 차창 너머로 쉽게 눈에 띄며 겨울이면 기러기가 V자 대형을 이루고 커다란 울음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광경도 나에게는 익숙하다. 덜 번화한 환경이 주는 소소한 이로움을 나는 좋아한다.
 

윙스팬에는 무려 170여 종의 새가 등장한다.
 
이런 나에게 <윙스팬>은 취향 저격의 게임이다. 새 이름과 그림과 대략적 서식지가 표시된 카드가 170장 이상 들어 있어서 카드만 봐도 행복한데 이걸로 게임도 할 수 있다니, 작은 조류 도감에 필적하는 콘텐츠를 가지고 재미있는 놀이까지 할 수 있다니, 이상적인 게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을 해 보면 게임의 우수함 덕분에 다른 친구들도 새의 매력을 알고 가는 느낌마저 드니 더욱 마음에 든다. 고정된 보드게임 모임 인원이 없고 다수의 초보 플레이어들과 게임을 하는 일이 많은 나에게는 게임이 어렵지 않다는 점 또한 장점으로 느껴진다.
 
<윙스팬>은 한 마디로 새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개인판에 많이 놓기 위해 경쟁하는 게임이다. 물론 새를 많이 내려놓는 것이 승리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새를 많이 내려놓는 것을 목표로 게임을 한다. 새 자체에도 점수가 있거니와 새가 많이 있으면 게임 중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어서 더 편하게 게임을 할 수 있다.
 

비어 있는 자기 게임판 위를 새 카드로 채워 나가야 한다.
 
새 카드를 많이 내려놓기 위해서는 먹이, 알, 카드라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새는 먹이를 비용으로 지불해야 내려 놓을 수 있다. 먹이는 5종류가 있어서 새의 식성에 맞춰야 하고 능력이 출중하거나 점수를 많이 주는 새는 보통 많은 먹이를 비용으로 요구하기 마련이다. 내려놓는 새는 초원, 숲, 습지의 세 서식지 중 하나에 놓이는데 한 서식지에 일정 수 이상의 새를 놓기 위해서는 먹이 이외에도 알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새를 내려놓으려면 그 새가 먹는 먹이를 내야 한다.
 
손에 든 카드만 내려놓을 수 있는 게임이기에 카드를 많이 내려놓으려면 카드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차례마다 새를 많이 내려놓기 위한 먹이, 알, 카드의 세 가지 행동과 새 카드를 내려놓는 행동까지의 총 네 가지 행동 중 하나를 해야 한다.
 

모이통에서 새가 먹을 먹이를 얻을 수 있다. 숲을 활성화하면 모이통에서 먹이를 얻는데, 숲에 새를 놓을수록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먹이가 더 많아진다.
 
<윙스팬>은 전형적인 '엔진 빌딩 스타일'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엔진 빌딩이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카드를 한 장 두 장 모으면서 이렇게 모인 카드로 상승 효과를 만들어, 행동의 효율이 커지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임을 뜻한다. 한 서식지에 놓인 새들이 특정 행동의 효율을 높여주고, 해당 행동을 할 때마다 한 서식지 새들의 특수 효과를 모두 활성화해 준다. 가령 숲 서식지에 놓은 새가 많아지면 먹이 얻기 행동을 할 때 더 많은 먹이를 얻을 수 있으며 숲 서식지 새의 특수 효과가 다 한 번씩 발동되는 식이다. 초원 서식지는 알 낳기 행동과, 습지 서식지는 카드 가져오기 행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새 카드가 예쁘게 늘어선 서식지 행동 한 번은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게 해 준다.
 

더 많은 새를 놓으려면 알이 필요하다. 초원을 활성화하면 알낳기를 할 수 있고, 초원에 새를 놓을수록 한 번에 낳을 수 있는 알이 더 많아진다.
 
1라운드는 모두가 차례 8번을 마치면 끝난다. 2라운드는 7번, 3라운드는 6번, 마지막 4라운드는 5번의 차례를 가지므로 라운드 당 행동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물론 개인판이 거대한 엔진으로 변모하는 게임이기에 후반에는 더 적은 행동 기회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내려놓은 새들, 새들이 가지고 있는 점수 관련 구성물, 매 라운드 마지막에 정산하는 목표, 게임 시작 때 최소 2장 확보하고 게임 중 추가로 받을 수 있는 각자의 비밀 목표 달성도에 따라 승점을 계산한다.
 
<윙스팬>의 네 가지 행동은 조금 더 크게 보면, 차례마다 자원을 확보하거나 자원을 소모하고 카드를 내려놓는 게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입문용 추천 게임으로 많이 거론되는 <스플렌더>나 <티켓 투 라이드>에도 비교할 만하다.
 

새를 많이 놓을수록 더 강력한 행동을 할 수 있고, 새들의 능력에 의한 상승작용이 일어나, 하나의 '엔진'이 만들어진다.
 
다만 나는 <윙스팬>이 입문용 게임으로는 조금 어렵다고 보는 편인데 그 이유는 카드 1장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새 이름과 새 그림과 새의 서식지 정보를 빼고도, 어떤 먹이를 몇 개 요구하는 새인지, 어떤 모양의 둥지를 짓는 새인지, 어떤 지역에 서식하는 새인지, 최대 몇 개의 알을 품을 수 있는 새인지, 이 새가 날개를 펼친 길이 즉 윙스팬은 몇 cm인지, 이 새의 점수는 몇 점이며 어떤 특수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등 꽤 많은 정보가 카드에 들어 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덱 만들기 형식의 게임이나 복잡한 트레이딩 카드 게임과 비교해도 될 만한 수준이라 겁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당장 게임에 필요하지 않은 다양한 정보를 즐기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지만, 처음 게임할 때엔 당장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윙스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나는 "<윙스팬> 이전에도 5가지 먹이 자원을 써서 새를 소환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매직: 더 개더링>이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하곤 한다. 내 개인판에 새를 빨리 많이 놓기 위해 최적화를 고민하는 과정은 트레이딩 카드 게임에서 전장에 부하가 될 생물을 까는 과정과 비슷하다. <윙스팬>의 새들은 다른 플레이어의 개인판에 놓인 새들과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말이다.
 

윙스팬의 카드에는 제법 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며, 게임에선 이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윙스팬>에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다. <윙스팬>은 다른 플레이어와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자기 차례의 행동 네 가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누군가가 행동을 선점하는 개념은 딱히 없다. 또 내 행동의 효율 역시 전적으로 내 개인판의 완성도에 달려 있다. 일부 새 카드의 효과가 가벼운 상호 작용을 유발하고, 먹이 가져오기 행동을 위한 모이통에 약간의 눈치 보기가 있고, 매 라운드 모든 플레이어가 공유하는 목표가 있어서 일종의 마일스톤 역할을 하는 정도 말고는 상호작용의 요소가 많지 않다. 게임 내 상호작용을 최소화하고 각자가 자신의 퍼즐을 풀며 마지막에 점수를 비교하는 스타일이 대세가 된 현대 전략 게임의 트렌드는 사실 격렬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게임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호작용이 잔잔한 게임이 대세가 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 잔잔한 상호작용과 아기자기한 구성물을 즐기며 내가 알고 있는 새 지식을 뽐내는 즐거움에 <윙스팬>을 한다. 게다가 나의 아쉬움은 확장판으로 어느 정도 보강되니 말이다.
 

<윙스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는 좀 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의 카드 조합 같은 기상천외한 것을 보고 싶다거나 조금 더 상호작용 있는 카드로 게임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플레이어가 있을 수 있다. 사실 내가 그러하다. 이런 사람들은 <윙스팬 확장: 유럽>을 더하면 꽤 만족할 수 있다. 나는 <윙스팬> 본판은 이른바 영업용이고 확장을 더할 때부터 진짜 게임이라 보는 편이다. 이 확장에서는 본판에 없던 '라운드 종료시 효과'가 추가됐으며, 일반적인 먹이 대신 다른 새를 먹이로 삼는 사냥 능력을 가진 새가 등장한다. 기본 규칙에 큰 변화 없이 다양한 효과가 추가된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카드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황을 조금 더 유심히 봐야 하는 게임으로 바뀐다.
 

새롭게 추가된 다양한 효과로 인해 확장에선 본판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다.
 
<윙스팬 확장: 오세아니아>를 더하면 게임이 더욱 더 흥미롭게 변한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취향에 가깝게 변한다. 이 확장에는 당밀이라는 새로운 먹이가 추가되는데 이 먹이는 일종의 조커 역할을 하며, 이것을 많이 확보하면 더 많은 새 카드를 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게다가 당밀을 많이 사용한 사람에게는 추가 점수까지 있다. '기존 게임의 균형이 파괴되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이 당밀은 모이통 주사위를 리셋하는 행동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모이통 주사위를 리셋하는 상황에 대한 긴장감이 커지고, 다른 플레이어가 모이통 주사위를 다시 굴리는 상황에도 더 집중하게 된다. <윙스팬>이 소위 '당밀베가스'로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또 오세아니아 확장판은 조류 애호가의 취향을 저격하는 독특한 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오세아니아의 개성적인 새들이 추가됐음은 물론이고, 새로운 자원인 당밀로 인해 또 다른 분위기의 게임으로 탈바꿈한다.
 
 
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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