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오트의 선택 - 7원더스 대결

7원더스를 이렇게 치열하게 즐길 수 있다니!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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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20대까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30대 즈음부터는 보드게임 업계에 종사하며 20여 년간 덕업일치의 외길을 걸어왔다. 박지원이란 이름보다는 가이오트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보드게임 플레이어. 그의 반쯤은 사사로운 보드게임 이야기를 들어보자. 
 
"7원더스를 이렇게 치열하게 즐길 수 있다니!"
 
 
성공한 타이틀 하나가 다양한 파생종을 만드는 시대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와 캐릭터가 영화, 애니메이션, 뮤지컬, 만화책, 게임 등으로 여러 매체에서 활약하며 돈을 불리는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고 있다. 그러나 보드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재미있는 게임 규칙이기에, 보드게임 영역에서 이런 방식의 확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카탄>이 그나마 여러 플랫폼에서 비디오 게임화되면서 CPU 경쟁자들을 캐릭터화하기는 했지만, 이 캐릭터들이 나오는 그림책이나 피겨 같은 것이 팔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캐릭터 사업 같은 거창한 영역까지 고려하지는 않더라도, 보드게임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파생 작품을 성공시키기도 쉽지 않다.
 
무슨 게임의 카드 게임, 무슨 게임의 2명 전용 게임, 무슨 게임의 주사위 게임과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오는 인기 작품 스핀 오프작 중에서 좋은 소리 들었던 작품은 별로 없다. 보통 이런 작품이 나오면 보드게임 팬들은 보통 ‘작가의 아이디어 고갈’을 의심하곤 한다. 이런 게임이 성공한 사례는 게임의 배경만을 유지하고 완전히 새로운 게임으로 만든 <아컴 호러 카드게임>와 카드 대신 주사위가 중심이 되는 게임을 만들며 게임 진행을 경쾌하게 만든 <뱅! 주사위게임> 정도가 있을 뿐이다.
 
정말로 작가들의 아이디어 고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게임을 만들었지만 이왕이면 기존 게임의 파생작으로 발매하여 상업적인 이익을 얻어 보자는 퍼블리셔의 제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년간 신작이 잘 안 나오고 파생작만 유난히 많이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빌리지>의 주사위게임, <뱅>의 2명 전용 게임, <사보타지>의 2명 전용 게임, <파워 그리드>의 카드 게임 버전, <카르카손>의 주사위 버전 등이 그 예이다. 이 파생작들은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하나, 이 좋지 않은 시기에 등장하여 모태가 된 본판 못지않은 작품으로 떠오른 게임이 하나 있다. <7원더스>의 2명 전용 게임인 <7원더스: 대결>이다.

7원더스: 대결은 모태가 된 7원더스에 뒤쳐지지 않은 게임으로, 시리즈물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7원더스: 대결>의 모태가 되는 <7원더스>는 고대 7대 불가사의와 그 불가사의들이 대표하는 문명 간의 성장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문명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면서 간결한 게임을 만드는 것은 보드게임 창작자들의 이상적인 창작 목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문명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는 간결한 게임’이라는 개발 목표를 일정 수준 이상 달성한 게임치고 훌륭하지 않은 게임은 없다. <7원더스>는 과학, 상업, 외교, 전쟁, 문화 등 문명의 다양한 면을 그려낸 작품이며 각 요소의 균형도 잘 잡혀 있다.
 
게다가 저런 다양한 요소를 구현한 게임치고는 규칙이 쉽고 게임 진행이 간결하며 2명부터 7명까지라는 흔치 않게 폭넓은 게임 인원을 자랑한다. 인원이 늘어나도 게임 시간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독특한 시스템을 채용하여 30분이면 고대 7대 세력의 흥망성쇠를 볼 수 있다. 나는 <7원더스>가 매우 완벽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기에 <7원더스>의 2명 전용 파생 작품이 나온다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나와는 달리 ‘<7원더스>는 괜찮은 게임이긴 하지만, 명작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정도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게이머들 사이에선 <7원더스: 대결>이 발매될 것이란 소식에 ‘왜 더 복잡하고 연구할거리가 있는 게임이 아닌 <7원더스>의 변형 게임이 나오냐’는 반응이 있었다. 요약하면 <7원더스>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든 조금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든 간에, <7원더스>의 2명 전용 게임은 그다지 기대되는 게임이 아니었다.
 

 
발매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던 <7원더스: 대결>은 2015년 에센 <슈필> 데뷔 무대에서 그야말로 백조처럼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덜 복잡한 게임에 인색한 하드코어 게이머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버렸다. 발매 직전까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나 또한 발매된 후엔 실제로 자주 해보게 되면서 <7원더스: 대결>이 <7원더스>를 넘어선 작품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7원더스: 대결>에서 군사나 과학 조건이 충족되면 그 즉시 승리한다. 누구도 이런 승리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점수 계산을 통해 승부를 가른다.
 
개인적으로 <7원더스: 대결>은 단점 하나 없는 완벽한 게임이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부분을 몇 가지 꼽아볼 수 있다.
 
첫째는 카드 선택 방식이다. <7원더스: 대결>은 원작인 <7원더스>보다 더 재미있는 독특한 방식의 드래프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원작은 손에서 카드 1장을 선택한 뒤 남은 카드를 상대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이를 2인 게임에 그대로 적용하면 두 사람의 손에서 왔다 갔다 하는 카드만 많아져 번거로워질 수 있다. <7원더스: 대결>은 원작의 드래프트 방식을 살짝 변경하여, 바닥에 카드를 다 깔아 놓고 교대로 카드를 선택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플레이어가 차례를 동시에 진행하는 원작과 달리 턴 방식의 게임이 되었지만, 2인 게임이기에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차례 한 번에 하는 행동은 카드 1장을 선택한 뒤 구매할 지 말지를 정하는 정도이기에 오히려 게임의 속도감은 상당하다. 
 
바닥에 깔리는 카드 배열도 흥미롭다. 플레이어는 배열된 카드 중 다른 카드에 가려지지 않고 카드의 모든 부분이 보이는 카드만 가져갈 수 있다. 그 결과 매 차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6장 정도이고, 두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이후에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결정된다. <7원더스>도 그렇지만 <7원더스: 대결>은 시너지가 나는 카드를 모아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카드 선택 과정에서 <7원더스> 원작에는 없었던 수읽기 요소가 생긴다. 또 배열된 카드 중 일부는 조건이 되어야 공개되는 카드이기 때문에 운 요소도 있다. 플레이 경험이 쌓이고 카드의 전체 구성을 알고 나면 뒤집힌 카드를 추리하는 재미도 있다. 3번의 시대마다 카드의 배열 또한 달라지므로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진행할 수 있다. 서로 교대로 카드를 가져갈 뿐이라 보드게임 초보자들에게 이해시키기도 쉽고, 경험 적은 플레이어도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이 핵심 규칙이 좋다.
 

 
<7원더스: 대결>이 위대한 두 번째 이유는 원작에 비해 문명 게임으로서의 디테일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과학 승리, 경제 승리, 문화 승리, 정복 승리 등의 디테일한 승리 조건은 문명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다. 그러나 <7원더스>에서 군사는 상대를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일 뿐 군사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과학 역시 <7원더스>에서는 세트를 모아 점수를 얻는 요소일 뿐, 플레이어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못하며 과학 승리 같은 것도 없었다. 최대 7명까지 함께 즐겨야 하는 <7원더스>는 이런 디테일에 한계를 보인다.  
 
하지만 <7원더스: 대결>은 다르다. 군사로 상대를 밀어내 승리할 수도 있고, 과학은 특별한 혜택과 함께 승리의 수단으로 변모했다. 물론 군사와 과학은 자원과 득점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군사 승리, 과학 승리를 노리지 않더라도 적당한 투자는 필요하며, 상대가 독점에 가깝게 차지할 경우 특별 승리 조건에 의해 게임에서 패할 수도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게임에 따라서는 군사를 포기하고 과학을 질주하는 문명과 과학을 포기하고 군사로 질주하는 문명 사이의 아찔한 경주가 벌어진다. 
 
또한 게임의 핵심 요소인 원더, 즉 불가사의가 더 재미있게 변모했다. <7원더스>에서는 각 플레이어에게 1개의 불가사의가 주어진다. 이 불가사의는 게임의 보조 목표가 되기도 하고, 게임에서 유리한 전략 방향을 제시하는 요소도 된다. <7원더스: 대결>에는 12종의 불가사의가 등장하며 게임 시작 때 각 플레이어에게 4개씩의 불가사의가 주어진다. 이 불가사의의 조합으로 인해 매 게임 시작 시 다른 상황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름이 <7원더스: 대결>이기에 게임에서 완성될 수 있는 불가사의는 최대 7개이다. 즉, 둘 중 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사의 4개 모두를 완공할 수 없다. 
 
<7원더스: 대결>의 세 번째 위대한 점은 2명 전용 게임의 ‘이상’에 상당히 근접한 게임이라는 것이다. 2명 전용 게임이 재미와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백중세가 펼쳐져야 하며, 중간에 눈덩이가 굴러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게임을 쉽게도 만들어 보고, 운의 요소를 늘려 보기도 하지만 운 요소, 전략 요소, 난이도 등의 균형이 황금 비율을 이뤘음을 인정받는 2인용 게임은 의외로 많지 않다. <7원더스: 대결>의 균형 감각은 지극히 이상적이다. 게임이 가벼워 설명할 것이 많지 않으나 생각할 것이 은근히 있고, 언제나 시소게임이 펼쳐지며, 끝나고 나면 약간의 아쉬움과 여운이 남으니 말이다.
 
 
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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