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에는 어떤 부분은 비슷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너무도 다른 게임들이 있다. 이 코너에서는 이런 게임들을 모아 비교 분석한다.
정장의 대척점에 있는 간편한 복장을 캐주얼이라고 하듯 간단히 배워서 즐길 수 있는 쉽고 짧은 게임을 캐주얼 게임이라 부른다. 캐주얼 게임은 진입장벽이 낮아 사용자층이 넓다. 보드게임 주류 커뮤니티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보드게임팬 외에도 많은 구매층이 있다. 특히 보드게임 인프라가 아직도 부족한 우리 나라에서 대박 나는 게임이라 하면 캐주얼 게임인 경우가 많다. 캐주얼 게임은 개발의 진입 장벽도 낮다. 기본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다른 베스트셀러 게임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개발이라면 하루에 10개라도 만들 수 있다.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
그런 반면 캐주얼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보드게임에 크게 심취하지 않거나 한두 가지 게임만을 집중적으로 하는 성향이 있으며, 주류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기 마련이다. 따라서 캐주얼 게임에 대한 정보를 볼 만한 곳도 많지 않다. 그래서 캐주얼 게임의 인기는 게임의 우수성과 함께 인지도와 운 등 여러 요소가 관여한다. 캐주얼 게임이 만들기는 쉬워도 성공은 쉽지 않다. 오늘도 개발 문턱이 낮고 대박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캐주얼 게임 또는 <할리갈리> 유사품이 만들어지고 있으나 성공사례는 거의 없다. 캐주얼 게임 히트작을 연이어 만들어내는 작가는 사실상 <할리갈리>의 하임 샤피르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벨기에 작가 장클로드 펠린이 눈에 띄는 신작 캐주얼 게임 하나를 발표했다. 그 게임의 우리나라 정식 출시 작품이 바로 <쿠키박스>. 이번 게임 대 게임에서는 캐주얼 게임계의 제왕 하임 샤피르의 야심작과 촉망받는 신예의 기대작을 비교해보기로 한다.
직관적인 규칙
좋은 캐주얼 게임은 잠깐 보고도 규칙이 바로 이해될 만큼 쉬워야 한다.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카드를 보고 그와 닮은꼴이 되도록 컵을 쌓는 게임이다. 규칙을 듣지 않아도 플레이를 보기만 하면 규칙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쉬운 게임이다. “같은 과일 다섯 개가 되면 종을 쳐라”라는 대원칙을 주입해야 하는 <할리갈리>보다도 쉽다고 볼 수 있다. <쿠키박스>의 기본 구도도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와 비슷하다. 카드를 보고 똑같이 재현하면 된다.

쿠키박스
어디선가 본 듯한 게임 플레이와 오리지널리티
컵 쌓기는 컵이 발명된 이래 매우 자연스럽게 발생한 놀이다. 특히 20세기 미국 어린이들이 규칙화한 종이컵 쌓기 경쟁을 유행시킨 것을 계기로 지금은 별도의 규격화된 컵과 규칙이 있는 스포츠로까지 발전했다.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이 컵 쌓기를 모태로 하고 있다. 그림을 보고 컵 쌓기를 하여 종을 치는 아이디어는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을 만한 것이지만 이 게임 이전에는 비슷한 게임이 딱히 없었다는 점에서 캐주얼 게임의 대가 하임 샤피르의 감각을 볼 수 있다. 컵이 있으면 쌓아보고 싶고 그림을 보면 똑같이 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이런 친숙함을 잘 이용한 게임이다.
반면 <쿠키박스>의 토큰은 익숙하지 않은 도구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토큰은 모두 9개로 양면 총 18면. 이 18면에 6종의 과자 그림이 3개씩 들어 있다. 게임에 익숙해지면 어떤 과자 뒤에 어떤 과자는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과자는 절대 없는 규칙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구는 생소하지만, 실제 게임 플레이는 친숙하다. 토큰의 위치를 바꾸고 뒤집는 게임 플레이는 뒤집어가며 조리하는 붕어빵이나 고기 뒤집기를 연상시킨다. 3×3 배열의 그림을 뒤집어가며 즐기는 플레이 감각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 열두 자판을 사용하며 즐기던 ‘XX 타이쿤’ 류 모바일 게임을 생각나게 한다.
둘 다 익숙하면서 딱히 다른 게임 모방으로 보이지 않는 독창성이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캐주얼 보드게임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콜벨
속도 경쟁이 중요한 캐주얼 게임에는 누가 빨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가 들어가곤 한다. <정글 스피드>의 토템, <할리갈리>의 종 등은 이 속도 경쟁의 재미를 더해주는 장치다. 이런 장치 없이 바닥이나 카드를 손바닥으로 치는 형식의 게임을 해보면 이들 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장치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역시 작은 종 콜벨이다.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주는 데다 게임을 위해 특별히 장치를 설계할 필요 없이 기성품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와 <쿠키박스>에는 모두 종이 들어 있다. 단, 주어진 미션을 빨리 완수한 사람이 먼저 종을 치는 형식이기에 두 사람의 실력 차가 크다면 이들 게임에서 종 치기 승부는 싱거워진다. 특히 <쿠키박스>는 퍼즐에 가까워 여러 사람의 완성 속도 차이가 날 수 있다.
카드와 확장성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5가지 색의 물체가 배열된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추가 카드를 더 만들 수 있다. 이 점을 활용해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에는 <할리갈리 컵스> 초판에 새 카드를 추가한 확장판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별도의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만든 카드가 수록된 ‘팬 에디션’도 나왔다. 이 팬 에디션에는 우리나라의 팬이 디자인한 카드도 두 장 들어있다.
<쿠키박스>도 이론상 과자의 수와 위치를 바꿔 더 많은 배열의 카드를 추가할 수 있지만 카드의 확장은 크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쿠키박스>의 카드는 상하좌우 없이 디자인되어 있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카드는 30장이지만 암기해서 푸는 것은 어렵다.
난이도
비슷한 두 게임이 갈라지는 부분이다.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는 문제를 보는 순간 해결 방법이 바로 보이는 스피드 진검승부라면 <쿠키박스>는 퍼즐을 풀 듯 접근해야 한다. 초보자는 대부분 1분 이상 매달려도 마지막 토큰 하나가 안 맞으며 계속 시행착오를 겪게된다. 맹목적으로 토큰을 뒤집기 전에 각 과자의 개수를 보고 과자 개수부터 맞춰주는 것이 요령이다. 요령만 알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속도감에 있어서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와 <쿠키박스>는 큰 차이가 있지만 <쿠키박스>는 퍼즐에 가까운 만큼 더 성취감이 있다. 두 게임 모두 카드 1장의 승부가 끝난 뒤 다른 세팅 없이 바로 다음 승부를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제5회 서울 보드게임 페스타에서 <할리갈리 컵스 딜럭스>(위)와 <쿠키박스>(아래)를 체험하고 있는 모습
덧붙임
<쿠키박스>와 같은 아이디어의 캐주얼 게임은 과거에는 흔치 않았으나, 2016년 미국 젠콘과 독일 에센 박람회에 비슷한 아이디어의 캐주얼 게임이 두 작품 이상 출품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새로 유행할 캐주얼 게임 방식일지도 모른다.
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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