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보드게임은 10만 종에 이른다. 수없이 많은 게임이 탄생해, 어떤 것들은 잊히고 어떤 것들은 명작으로 남는다. 이 코너에서는 보드게임의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 100선을 뽑아 소개한다.
협력 게임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여러 사람이 겨루어 1등 한 사람을 뽑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목표, 즉 한 사람의 패자를 뽑는 것이 목표인 게임도 있다. 그런 게임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바퀴벌레 포커>, 그리고 <바퀴벌레 포커 로얄>을 꼽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게임의 테마는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예쁘고 화려하거나 멋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퀴벌레, 쥐, 두꺼비 등 누구나 기피하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소수의 마니악한 사람들만이 즐기는 게임일 것 같지만, 이 게임은 첫선을 보인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최고의 파티 게임이자 블러핑 게임의 대명사다.

바퀴벌레, 전갈, 두꺼비, 박쥐 등 각종 기피 동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제목이 <바퀴벌레 포커>이긴 하지만, 바퀴벌레만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박쥐, 파리, 전갈 등 정체를 숨긴 각종 기피 동물 모두가 한 판 한 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게임을 해보면 정체를 숨긴 동물들의 마피아 게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인간인 플레이어들은 이 동물들 사이에서 그들의 속임수를 간파하거나, 속임수에 휘둘려 속거나 할 뿐이다. 괴상한 동물들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보자.
<바퀴벌레 포커>는 카드만으로 이뤄진 카드게임이다. 그런 만큼 게임 준비도 간단한데, 모든 카드를 모아 잘 섞은 다음 7장을 뽑아 한쪽에 뒷면이 보이게 쌓아 더미를 만들고, 나머지 카드를 모든 플레이어가 똑같이 나눠 가지면 끝이다. 각 카드에는 각종 기피 동물들이 한 종류씩 그려져 있으며, 게임이 시작되면 플레이어들은 카드에 그려진 동물의 정체를 숨긴 채로 한 장씩 주고받기 시작할 것이고, 이 카드를 자신이 아닌 다른 플레이어에게 가게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손에 든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 다른 플레이어에게 건네며, 무슨 카드인지 이야기하자. 진실로 이야기하건 거짓으로 이야기하건 상관없다.
먼저 시작 플레이어는 자기 손에 든 카드 중 한 장을 골라, 다른 플레이어 중 한 명에게 뒷면이 보이게 주면서 그 카드가 어떤 동물이 그려진 카드인지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 진실되게 말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 예를 들어 쥐가 그려진 카드를 건네주면서 ‘이것은 쥐야’라고 말해도 상관없고, ‘이것은 두꺼비야’라고 말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카드를 건네주는 상대도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카드를 받은 플레이어는 카드를 건네준 플레이어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추측하는 데 도전하거나, 아니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겨 일단 닥친 위험을 회피할 수도 있다.

건네받은 카드를 확인하고 다른 플레이어에게 넘길 것인가? 아니면, 이전 플레이어가 한 말의 진위를 가릴 것인가?
위험을 회피하기로 했다면 혼자만 카드 앞면을 확인한 다음, 아직 이 카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다른 플레이어 중 한 명에게 건네며 어떤 동물 카드인지 말한다. 이때도 이 동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실되거나 거짓되거나 원하는대로 말할 수 있으며, 카드를 건네준 플레이어가 말한 동물의 이름을 그대로 말해도 되고, 다른 동물이라고 부인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이미 이 카드가 무엇인지 확인한 바 있는 플레이어에게는 카드를 건넬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카드를 건네받은 플레이어는 위험을 회피한다는 선택을 할 수 없고 반드시 카드를 건네준 플레이어의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추측하는 데 도전해야만 한다.

이전 플레이어가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선언하고, 카드를 앞면으로 펼쳐 공개했다. 추측에 도전한 플레이어와 이전 플레이어 모두에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추측에 도전하기로 했다면 카드의 앞면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카드를 건넨 플레이어가 진실을 말했는지 거짓을 말했는지를 선언한 후 카드를 앞면으로 펼쳐 공개한다. 카드를 공개했을 때 선언이 맞았다면, 카드를 건넸던 플레이어가 그 카드를 가져와 자기 앞에 펼쳐둔다. 하지만, 선언이 틀렸다면, 선언한 플레이어가 그 카드를 자기 앞에 펼쳐둔다. 이렇게 자기 앞에 카드를 펼쳐놓게 된 플레이어가 새로운 시작 플레이어가 되어 자기 손에 든 카드 한 장을 골라 누군가에게 주며 게임을 계속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카드 건네기를 진행하다가, 누군가 자기 앞에 한 종류의 동물 카드 4장을 모았거나, 자기 차례인데 다른 플레이어에게 줄 카드가 손에 한 장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패배하고 게임이 끝난다.

파리 4장을 모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패배했다. 이렇게 패배자가 결정되면 게임이 종료된다.
이 게임은 다른 군더더기 없이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려내는 1:1 심리전의 연속이다. 진실을 말할 때는 상대가 믿지 않기를 바라고,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가 믿기를 바라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든 본질적으로는 블러핑이다. 플레이어는 블러핑을 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진실로 블러핑을 할 것이냐 거짓말로 블러핑을 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카드를 받는 사람은 이 블러핑을 간파할 것이냐, 아니면 다음 사람에게 카드를 넘겨서 그 사람에게 블러핑할 것이냐를 선택하게 된다.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속이고 간파하고의 연속이기 때문에 게임의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고, 복잡한 전략보다는 진실을 말할 것이냐 거짓을 말할 것이냐의 간단한 선택이 중요하기에 속도감도 빠르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게임 구조가 굉장히 간단함에도 정작 플레이어는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는 점이 이 게임의 특징이다. 진실로도, 거짓으로도 블러핑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의 카드에 여러 다른 증언이 쌓일수록 카드를 받은 사람은 그 증언 중 어떤 것이 진실일지(실제로는 모두가 거짓일 수도 있지만) 상상하게 된다는 점 등, 단순한 구조를 다채롭게 만드는 여러 장치가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도 게임을 돋보이게 만드는 점은 카드에 그려진 각종 동물의 그림이다. 동물의 구서은 각종 기피 동물뿐이지만 그 기피 동물들을 생동감 넘치고 귀엽게 잘 표현했으며, 같은 동물 카드끼리도 포즈나 구도 등이 다른 점도 게임의 묘미를 더해준다. 실제로 이 그림들이 <바퀴벌레 포커> 플레이어들에게 상당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개발사 드라이 마기어에서 이후에 출시한 수많은 벌레 소재의 게임들에서도 <바퀴벌레 포커>의 그림을 담당한 롤프 보그트 화가의 그림을 꾸준히 사용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모두 다 같은 파리 카드이지만, 카드마다 포즈와 구도가 다르다.
<바퀴벌레 포커>는 룩셈부르크에서 거주하는 자크 자이멧 작가가 만들고 독일의 드라이 마기어에서 발매한 게임이다. 자크 자이멧 작가는 1996년부터 상용 보드게임을 발표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보드게임 작가다. <유령대소동>이나 <바퀴벌레 포커> 등의 대표작으로 인해 파티 게임 작가로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데뷔 초기부터 한눈팔지 않고 파티 게임에만 열중한 이력이 돋보이는 작가다. 특히 <밤볼레오>, <햄스터롤> 등 나무 구조물 등을 사용해 균형을 잡는 등의 손기술 게임을 만드는 데 열중했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도 충분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유명 작가로 확실히 자리 잡은 것은 2004년에 발표한 <바퀴벌레 포커>가 독일 올해의 게임상 추천작으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이때의 수상에 힘입어 <바퀴벌레 포커>가 여러 나라 판본으로 만들어지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즈음부터 자크 자이멧 작가의 게임 개발 방향도 빠르게 끝내는 카드 게임 쪽으로 좀 더 기울었다. <바퀴벌레 포커>의 유행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을 기세를 보이자 자크 자이멧 작가와 드라이 마기어는 이 게임의 시리즈화를 기획했는데, <바퀴벌레 샐러드>, <바퀴벌레 수프>, <타란튤라 탱고> 등 수많은 벌레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비교적 최근인 2021년에도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는 <메뚜기 포커>가 출시되었는데, 비록 콘셉트뿐이라 할지라도 한 게임의 시리즈가 20년간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퀴벌레 포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바퀴벌레 포커와 바퀴벌레 포커 로얄
2012년에는 <바퀴벌레 포커 로얄>이라는 사실상의 개정판을 발표했는데, 동물 종류가 8종류에서 7종류로 줄고 그 대신 '왕'이 추가됐다. 왕은 7종류의 동물 모두에 존재하는데, 이 카드들은 해당 동물이면서 왕이기도 한 두 가지 조건에서 진실이 되는 카드들이다. 왕의 존재로 인해 플레이어들은 동물의 종류에 대한 것 외에도 '이 카드는 왕이야'와 같이 왕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에 대해서도 블러핑을 할 수 있게 됐다. 왕 카드를 자기 앞에 펼쳐놓게 된 플레이어는 게임 시작 단계에서 따로 빼놨던 카드 중 1장을 추가로 더 받게 되니, 왕 카드의 위력은 일반 카드의 2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거짓이 되는 카드라거나, 언제나 참이 되지만 왕은 될 수 없는 카드와 같은 특수 카드의 추가로 인해 게임의 묘미를 더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바퀴벌레 포커>는 바로 이 <바퀴벌레 포커 로얄>이다.

바퀴벌레 포커 로얄에 추가된 왕 카드들. 이들은 해당 동물이면서 왕이다.
글 김성일
수상 이력
2007 Hra roku Nominee
2006 As d'Or - Jeu de l'Année Nominee
2005 Japan Boardgame Prize Best Foreign Game for Beginners
2004 Spiel des Jahres Recommended
2004 Kinderspielexperten "8-to-13-year-olds" Nominee
2004 Fairplay À la carte Runner-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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