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보드게임의 침략
2018년 1월 미국 잡지 <애틀란틱(the Atlantic)>에는 ‘독일 보드게임의 침략 The Invasion of the German Board Games’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를 비롯한 여러 영국 출신의 록 밴드가 미국에 진출하며 미국의 대중 문화에 변화를 끼치는 모습을 ‘영국의 침략 British Invasion’이라 부르던 것에 빗댄 표현으로, 최근 십여 년 간에 걸쳐 독일 보드게임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보드게임 시장과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해당 기사는 미국 시장에서 2017년 봄 보드게임 전체 매출이 2016년 봄에 비해 28% 증가했다는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2020년까지도 비슷한 성장세가 이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가정용 게임기의 성공 등으로 인해 비디오 게임이 매우 빠르고 넓게 그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보드게임 시장은 침체 일로를 겪어 왔다. 따라서 이러한 매우 큰 폭의 성장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할 것이다. 80~90년대 비디오 게임의 급격한 성장은 보드게임 업계에 큰 위협이 됐으며, 대형 보드게임 퍼블리셔이던 파커 브러더스, 밀튼 브래들리, 아발론 힐 등이 인수 합병된 것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반전된 것이다.
이런 반전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애틀란틱>이 기사를 발표하기 이전인 2014년 11월에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 역시 이와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는데, 2014년을 기준으로 과거 4년간 보드게임 업계는 매년 25~40% 가량 성장을 거뒀다고 한다. 과거 보드게임은 비디오 게임으로 인해 몰락에 가까운 침체를 겪었지만, 어느새 이런 침체를 딛고 다시 일어난 것이다.
보드게임 시장의 성장은 보드게임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드게임을 하고 놀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 그동안 쇠퇴일로에 있던 보드게임에 이런 반전을 가져왔을까? 직접 손으로 만지며 게임을 즐길 수 있고,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대면하고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점이 부각되며, 그에 맞는 보드게임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런 반전의 계기라 할 수 있다. 비디오게임이 대체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발해냄으로써 보드게임이 되살아난 것이다.
비디오 게임의 성장 이후 보드게임이란 단어는 한때 유치한 미취학 어린이용 놀이 도구를 의미하는 단어로 전락했었다. 하지만, <카탄>으로 대표되는 독일 보드게임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보드게임이 결코 미취학 어린이용 장난감이 아닌, 성인들이 진지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취미용 보드게임은 아직 주류 문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시장은 점차 커지고 있다. 보드게임, 만화 등의 취미 활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웹사이트인 ICV2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취미용 보드게임 시장은 2013년 7,500만 달러에서 2016년에는 3억 5,000만 달러로 그 규모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애틀란틱>은 이런 흐름의 중심에 <카탄>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영국의 침략으로 인한 록 음악 중흥의 중심이 비틀즈였다면, 독일 보드게임의 침략으로 인한 보드게임 재건의 중심은 바로 <카탄>인 셈이다.

독일 보드게임의 선봉, 카탄
독일 보드게임의 침략은 비단 미국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보드게임 카페가 처음 생겨난 2002년에 보드게임 카페의 주력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카탄>이었다. 당시 ‘보드게임 카페’라는 업종을 처음 만들어낸 윤지현 씨가 보드게임 카페를 만들게 된 계기에도 <카탄>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가 사실상 PC방의 시대를 연 것처럼 <카탄>이 보드게임 카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보드게임 카페 매니저를 역임한 박지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카페 영업을 시작하고 마칠 때까지 하루 종일 <카탄> 게임 규칙만 설명한 적도 있었으며, 보드게임 카페 직원의 평가 항목 중 ‘<카탄>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하는 것이 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보드게임 카페는 규칙이 쉽고 빠르게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주력으로 소개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보드게임 카페에서는 <카탄>을 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국내에서 보드게임이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보드게임 카페임을 감안하면, <카탄>은 우리나라 보드게임 시장 확대에 기여한 바가 있는 셈이다.
카탄이 일으킨 나비 효과
<카탄>은 이렇듯 여러 곳에서 독일 보드게임의 존재를 알린 게임이다. 1995년에는 보드게임계의 양대 상이라 불리는 독일 <올해의 게임상>과 <독일 게임상>을 석권했다. <올해의 게임상>은 보드게임 평론가들에 의해 수상되는 상이고, <독일 게임상>은 소비자인 게이머들의 투표에 의해 수상되는 상임을 감안하면, <카탄>은 평론가와 소비자 모두를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올해의 게임상을 수상한 직후의 카탄. 개척자에 해당하는 Siedler가 부각되고 카탄이 부제처럼 작게 표시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1995년에 독일 퍼블리셔 코스모스가 출판한 <카탄>은 이듬해인 1996년에 미국 퍼블리셔 메이페어 게임즈를 통해 미국에 상륙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것이 독일 보드게임 침략의 시작점이 될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카탄> 판매량은 메이페어 게임즈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그것을 본 메이페어 게임즈의 직원 제이 터멀슨은 독일 보드게임이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현실로 만들고자, 메이페어 게임즈에서 나와 새로운 보드게임 퍼블리셔인 리오 그란데 게임즈를 설립했다. 그리고 독일 보드게임의 영어판 출판 및 배급권을 따내며 다양한 독일 보드게임의 영어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1996년에 미국의 보드게임 퍼블리셔 메이페어를 통해 출판된 <카탄> 영어판. 이것이 독일 보드게임 침략의 서막이었음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렇게 독일 보드게임이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출판됐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단순히 미국 소비자가 독일 보드게임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넘어, 언어 장벽으로 인해 널리 퍼지지 못했던 독일 보드게임이 더 넓은 세상으로 퍼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보드게임 문화가 전멸하다시피 한 많은 곳에서 독일의 현대 보드게임을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독일의 현대 보드게임을 접하게 된 많은 나라에서 독일 보드게임들에 영향을 받은 게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현대 보드게임의 부흥은 <카탄>이 일으킨 나비 효과로 인해 나타났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독일어권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 <카탄>은 2022년 1분기까지 40여 개 언어로 번역돼서 판매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4,000만 개라는 경이적인 누적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카탄
어느새 발매 25주년을 넘어선 <카탄>은 전세계적인 보드게임 시장 성장을 이끈, 독일 보드게임 침략의 선봉이다. 2015년에 코스모스와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가 <카탄>으로 제목을 변경하기 전에 이 게임의 본래 제목은 <카탄의 개척자 Die Sielder von Catan>였다. 그래서 게임의 제목을 줄여 말할 때 ‘개척자’라 부르는 사람과 ‘카탄’이라 부르는 사람이 혼재돼있었는데, 일반 명사라 다른 게임과 혼동의 여지가 있는 ‘개척자’를 떼어버리고, 고유 명사인 ‘카탄’만 남긴 것이다.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는 2015년에 '카탄의 개척자'에서 '카탄'으로 게임 제목을 바꿨다.
<카탄>에서 플레이어들은 카탄이라 불리는 무인도에 도착한 개척자가 된다. 이 개척자들은 나무, 밀, 양 등 각종 자원을 얻고, 이 자원을 활용해 마을을 건설하고, 도시로 발전시키는 등 활발한 개척 활동을 벌인다. <카탄>에서 플레이어들은 누가 가장 먼저 일정 수준의 개발을 완료하는가를 두고 서로 경쟁하지만, 직접적으로 다른 플레이어의 것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도둑이나 기사 카드를 이용해 상대 플레이어의 자원 생산을 방해하거나, 주요 도로를 선점하여 다른 플레이어의 확장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견제만 가능하다.
이런 작은 견제 요소가 있지만, 플레이어들은 남을 방해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무인도였던 카탄 섬의 문명을 함께 건설하기 위한 공동체적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카탄 섬에서 어떤 자원이 어디서 생산되는지는 처음 게임을 준비할 때 무작위로 정해지며, 처음 마을을 건설할 때 이미 다른 플레이어가 마을을 지은 곳에는 마을을 건설할 수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마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다르다. 이렇듯 게임 중 서로 보유한 자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로•마을•도시 등을 건설할 때 필요한 자원은 누구에게나 같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마다 남는 자원과 모자란 자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의 자원을 교환하는 단계가 마련돼 있다. 그리고 이런 자원 교환 행위로 인해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인 협력이 일어난다.

내게 남는 철광석을 주고 내게 없는 벽돌을 받아오면, 이를 이용해 도로를 건설할 수 있다.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가 처음 <카탄>을 기획할 때엔 현재처럼 카탄 섬 하나를 배경으로 하여 이를 개척하는 정도의 작은 규모의 게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배경과 서사를 가진 게임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섬을 발견하기 위한 탐사, 섬을 발견한 뒤 개척, 개척 후의 세력 다툼까지를 다룬 장대한 규모의 게임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 규모가 너무 큰 관계로 게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규칙을 익히기에 지나치게 복잡했으므로 이를 분리해서 별도의 게임 3개 <엔트데커>, <카탄>, <뢰벤헤르츠>를 만들었다. 이 중 섬을 개척하는 과정을 다룬 게임이 바로 <카탄>이며, <엔트데커>는 섬을 발견하기 위해 탐사하는 부분을 다뤘고 <뢰벤헤르츠>는 정착 이후 각자의 세력을 이룬 뒤 생겨나는 다툼을 다뤘다. 이렇게 애초에는 하나의 계획에서 나뉜 부분이 각기 다른 게임으로 출판된 것으로 미뤄볼 때 원래 계획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카탄 섬에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도 때론 서로의 협력이 필요하다.
카탄 확장판들
3개의 게임으로 나뉘어 별도로 출판되긴 했지만,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는 이 모두를 하나에 담을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5년에 <카탄>이 큰 성공을 거두자,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와 코스모스는 새로운 확장판을 통해 <카탄>의 세계를 확장하고, 게임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확장판은 3~4명이 할 수 있던 <카탄>을 더 많은 플레이어가 함께 할 수 있게 한 <카탄 확장: 5~6인용>이다. 그런 다음, 카탄 섬을 벗어나 여러 섬으로 영역을 확장하거나,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규칙을 추가한 <카탄 확장: 항해사>가 만들어졌다. <카탄 확장: 항해사>는 <카탄>이 성공을 거둔 직후인 1997년 처음 출시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확장판으로, 여느 확장판이 다 그렇듯이 기본판에는 없던 새로운 규칙이 추가됐다. 이렇게 추가된 규칙은 플레이어에게 기본판과는 또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카탄 확장: 항해사>에서 주요하게 추가된 부분은 애초의 <카탄> 개발 과정에서 빠졌던 ‘탐사’ 부분인데, 같은 해에 다른 퍼블리셔를 통해 출판된 <엔트데커>와는 다른 방식으로 탐사를 표현해냈다. 독립 게임이 된 <엔트데커>에서 플레이어가 온전히 새로운 섬과 대륙을 찾아나서는 탐험가 역할을 맡았다면, <카탄 확장: 항해사>에서는 <카탄> 기본판에서처럼 개척을 중심에 두면서, 추가로 개척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섬으로 점차 뻗어나가는 형식이다.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카탄 섬의 개척자지만, 여기에 항해사라는 추가 역할이 부여된 모습을 띤다.
카탄 섬에서 벗어나 여러 섬으로 이뤄진 군도를 탐사하고 개척한다는 점이 <카탄 확장: 항해사>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그리고 <카탄 확장: 항해사>에는 섬과 섬 사이를 오가기 위한 ‘해상 교역로’가 새롭게 추가됐다. ‘해상 교역로’는 배로 표현되는데, 배는 바다에 인접한 마을에서 뻗어나가며, 바다를 건너 해상 교역로가 다른 섬과 연결되면 그 곳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배를 만들기 위한 비용은 양과 나무 하나씩이다. 기본판에서 상대적으로 효용 가치가 낮았던 양이,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되면서 좀 더 가치 있는 자원으로 탈바꿈해 자원 간의 균형이 맞춰진 것도 <카탄 확장: 항해사>에서 달라진 점이다.
<카탄 확장: 항해사>가 나온 다음 해인 1998년에는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가 출시됐다.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가족 게임에 가까운 <카탄>을 보다 더 전략적인 게임으로 만든다는 평을 받는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는 당연하게도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카탄>은 물론 <카탄 확장: 항해사> 확장판까지 포함해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카탄>에서 도시와 기사 각각의 역할을 더 강화한 확장판이다. <카탄: 도시와 기사>에서는 마을을 도시로 발전시킬 때 기존에 얻을 수 있던 자원 외에 ‘상품’이라는 새로운 자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상품을 이용하여 도시를 더 발전시킬 수 있으며, 도시를 발전시키다 보면 승점 2점을 추가로 제공하는 수도로 만들 수 있다. 수도를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는 당연하게도 게임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카탄> 기본판에 있던 발전 카드를 대신하는 ‘진보 카드’가 추가됐는데, 도시를 발전시켜야만 해당 분야의 진보 카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도시의 역할이 더욱 더 중요해졌다.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에는 그동안 발전 카드 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사도 게임판 위에 놓이는 실물로서 등장한다. 기사는 도둑을쫓아내는 역할은 물론이고, 상대 플레이어의 교역로를 끊을 수도 있으며, 카탄 섬에 새로 등장한 위협인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군사력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에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에서는 기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는 1998년에 발매한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까지로 <카탄> 시리즈가 완결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카탄>의 추가 확장을 요구하는 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2007년에 새로운 확장 <카탄 확장: 상인과 야만인>을 2013년에는 <카탄 확장: 탐험가와 해적>을 발표하며,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더 큰 카탄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카탄의 배경 이야기
<카탄>의 어디에도 이 게임의 배경을 소개하는 부분은 없다. 카탄 섬의 지리적인 위치는 물론이고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으며, 그저 게임에 등장하는 그림을 보며 유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 역시 게임을 만들 당시에는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을 뿐, 세세하게 게임의 배경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구상하지는 않았다. 그런 관계로 메이페어에서 냈던 <카탄> 영어판의 경우는 독일어판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이용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카탄>이 성공을 거두고 <카탄 확장: 항해사>와 <카탄 확장: 도시와 기사>가 나온 뒤인 1998년,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는 카탄 섬의 개척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배경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는 구상할 수 있어도 실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까지 쓸 자신은 없었던 그는 어느 날 레베카 가블레 작가의 소설 <포르투나의 미소>를 접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자 마자, 레베카 가블레 작가야말로 자신이 구상하던 이야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2000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처음 미팅을 했고, 2001년 쾰른에서의 미팅을 통해 <카탄의 개척자> 소설을 내기로 결정한다. 그 후, 기본적인 배경 이야기와 초안을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가 만들고, 레베카 가블레 작가가 이를 다듬고 상세한 이야기를 덧붙여 소설로 만들어 냈다. 이 소설은 2년 간의 집필 작업 끝에 2003년 독일에서 출판됐다.

레베카 가블레 작가의 소설 , 카탄의 개척자
<카탄의 개척자> 소설의 배경은 서기 850년경 북유럽이다. 흔히 바이킹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이 바로 주인공이다. 서기 8세기부터 유럽 각지로 진출해 활약하던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여러 섬을 개척하곤 했는데, 이런 역사적인 활동을 기반해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소설에서는 엘라준트라는 북유럽의 한 마을에 살던 칸다미르와 오스문트가 이웃의 튜론족으로부터 마을을 약탈당한 후 새로운 땅을 찾아 여행에 나서고, 마침내 카탄 섬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다. 양치기 오스문트, 벌목과 목공을 잘하는 칸다미르, 광석 채굴과 대장장이 일을 하는 하랄드처럼 각자 다른 자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서로 교역하는 모습을 보면 <카탄> 보드게임의 교환 단계가 떠오를 것이다. 또한 개척자들의 마을을 수시로 약탈하는 올라프 패거리가 보드게임에 등장하는 도둑임을 매우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카탄 한국어판이 탄생하기까지
보드게임 카페를 중심으로 <카탄>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2002년임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카탄>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는데, 한국을 포함한 <카탄>의 아시아 지역 판권을 엉뚱하게도 일본의 비디오 게임 회사 캡콤이 가지고 있던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2002년 당시 <카탄>은 유럽과 북미 일부 지역에서만 각 나라의 언어판이 만들어졌을 뿐 아시아권 언어판이나 배급망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일본의 보드게임 퍼블리셔 트라이 소프트가 1996년에 <카탄> 일본어판을 냈지만, 흥행에 실패해 시장에서 철수한 이후, 어느 누구도 아시아 지역에서 <카탄>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관계로, 캡콤은 손쉽게 아시아 전 지역에 대한 라이선스를 확보할 수 있었다.

2002년에 발매된 카탄 캠콤판
하지만, 캡콤의 <카탄>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독일산 보드게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카드와 타일의 품질이 조악했고, 전반적으로 크기가 작아져 게임을 하기 불편했다. 지형 타일도 각각 따로 떨어진 육각형 모양이 아닌 타일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동심원 3개 형태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캡콤의 <카탄>은 원래의 <카탄>과 달리 제한된 형태의 게임판만을 만들 수 있었는데, 게임을 할 때마다 달라지는 지형 구성을 통해 매번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약해지는 느낌이라 캡콤의 <카탄>은 매우 평가가 좋지 못했다.
캡콤이 아시아 지역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초의 <카탄> 한국어판 역시 이 캡콤 버전을 기반으로 출판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캡콤의 한국 파트너였던 코코캡콤에서 캡콤의 <카탄>을 기반으로 한 <카탄> 한국어판을 냈지만 보드게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외면 받았다.

카탄 독일어판을 기반으로 해 2005년에 발매된 카탄 한국어판
이 문제는 한국의 보드게임 퍼블리셔 페이퍼이야기가 수 년간 작가와 코스모스를 설득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해결되었다. 캡콤의 아시아 라이선스 중 일부인 한국 라이선스가 회수된 것이다. 그리고 <카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독일어판을 기반으로 새로운 <카탄> 한국어판이 2005년에 만들어지게 된다.
캡콤은 <카탄>을 시작으로 아시아를 무대로 보드게임 사업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카탄: 록맨 에디션>과 같이 자사 캐릭터를 이용해 색다른 배경을 가진 버전을 만든 것을 마지막으로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보드게임 사업을 정리하게 됐으며, 캡콤과 <카탄> 사이의 접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일본의 보드게임 전문 퍼블리셔인 GP사에서 독일어판을 기반으로 한 <카탄> 일본어판이 나와 일본에서도 원작의 느낌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됐다.
<카탄>은 한국어판이 출시된 후 꾸준히 한국에서도 꾸준히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2007년부터는 코리아보드게임즈가 페이퍼이야기의 사업권을 인수해 <카탄> 한국어판을 이어오고 있다.
2005년에 출판된 <카탄> 한국어판에는 부제로 ‘보드게임의 제왕’이라 적혀 있다. <카탄>이 가진 매력과 <카탄>이 플레이어들에게 선사하는 즐거움, <카탄>이 전 세계 보드게임계에 끼친 영향력 등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적절한 타이틀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 보드게임계에 큰 영향을 끼친 클라우스 토이버 작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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