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100 - 챠오챠오

거짓말을 하여 이득을 얻거나,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하거나.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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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보드게임은 10만 종에 이른다. 수없이 많은 게임이 탄생해, 어떤 것들은 잊히고 어떤 것들은 명작으로 남는다. 이 코너에서는 보드게임의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 100선을 뽑아 소개한다.
 
 
2000년대 초반, 보드게임 카페 유행 이전의 한국에서는 '보드게임'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드게임은 한번 유행하기 시작하자 미디어나 대형 이슈의 도움 없이 빠르게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 보드게임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수많은 게임이 가진 다양성이었다.
 
당시 유행을 이끌었던 <카탄>, <할리갈리>, <젠가>는 모두 서로 다른 게임이다. <카탄>은 플레이어 간에 거래가 중요한 게임이고, <할리갈리>는 재빠른 두뇌 회전과 손이 중요한 게임이다. <젠가>는 위기를 계속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게임이다. 보드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전에 생각해 본 적 없는 놀이 방법이었고, 새로운 게임을 배운다는 것은 또 다른 신기한 놀이를 만나는 일이었다.
 

절벽 사이에 위태롭게 걸린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신기한 게임이 있었다. 모두가 하나의 규칙을 준수한다는 전제에서 성립하는 것이 보드게임이라는 놀이인데도, '서로 속이기'를 허용하는 게임이었다. 남을 속이지 못하면 심각한 피해를 보고, 모든 사람이 나를 속이려 든다. 말로만 들으면 마치 삭막하고 비정한 게임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이 게임은 심각한 분위기는커녕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챠오챠오>라는 게임이었다. ‘챠오 챠오(Ciao, Ciao)’라는 말은 ‘잘 가, 안녕’ 정도의 의미를 가진 이탈리아어다. 뉘앙스에서 느껴지듯이 이 게임에서 저 말은 영원한 작별의 의미를 내포한다.
 

주사위를 굴려 게임 말을 움직이지만, 주사위를 굴린 결과는 혼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식인 식물이 우글거리는 정글, 절벽 사이에 위태롭게 걸린 다리 위를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건너간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서로 돕기는커녕, 이들은 서로를 제치고 혼자만 건너편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모두가 먼저 가기 위해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 그 사람은 다리 밑으로 밀려 떨어진다. 다리 밑에서 기다리는 식인 식물들의 입으로 추락해 가는 거짓말쟁이를 향해 비정한 인사말이 던져진다. “챠오챠오…”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면 다리에서 떨어진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마다 말 7개씩을 받고, 각자 말 1개를 구름다리의 출발점에 놓는다. 그리고 주사위 통에 주사위를 넣고 돌아가며 차례를 가진다. 자기 차례에는 통 속의 주사위를 굴리고 그 결괏값을 혼자만 본 다음, 주사위 숫자가 얼마가 나왔는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발표한다. 이때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확인을 요구할 수도 있다. 누군가 확인을 요구했다면 통 속의 주사위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확인 결과 거짓말이었다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자기 말 1개를 구름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 확인을 요구해서 거짓말을 밝혀낸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주장한 숫자만큼 자기 말을 전진시킨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반대로 확인을 요구한 사람이 자기 말 1개를 구름다리 아래로 떨어뜨려야 하며 차례인 사람은 주사위 숫자대로 자기 말을 전진시킨다. 물론 주사위 결과를 발표한 순간 아무도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냥 발표한 숫자만큼 자기 말을 전진시키면 그만이다.
 

X가 나오는 순간은 아무리 정직하고 신중한 플레이어라도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정직하게 말하든 거짓말을 말하든 순전히 플레이어의 마음이지만, 숫자가 아니라 X가 쓰인 면이 나왔다면 반드시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의 말 3개가 먼저 구름다리를 건너면 그 즉시 게임이 끝나고, 차례인 사람이 승리한다. 만약 게임말 중 상당수가 다리 아래로 떨어져 그 누구도 자기 말 3개를 다리 건너편으로 보내지못하는 경우, 점수를 계산한다. 게임 중 제일 처음으로 다리를 건넌 말은 1점, 그다음 말은 2점, 이런 식으로 뒤에서부터 높은 점수를 받는다.
 

자기 말 3개가 다리를 건너는 데 성공한 파란색 플레이어의 승리.
 
외연만 보면 주사위를 굴리고 칸을 이동하는 사다리 게임처럼 보이지만, 주사위를 굴리고 이동하는 행동은 점수 계산의 연장에 가깝고 게임의 본질은 블러핑과 베팅이다.
 
역설적이지만 보통 블러핑에 기반을 둔 심리전 게임에서 블러핑을 자주 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정직하게 플레이하는 게 오히려 유리한 게임도 많다. 더구나 게임을 처음 하는 초보자라면 거짓말을 할 타이밍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게임이 끝날 때까지 블러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정직하게 하고 싶어도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바로 X가 나오는 순간이다. 주사위의 6면이 1, 2, 3, 4, X, X으로 이루어져 있어 33%의 확률로 X면이 나오게 되는데, 이 순간에 플레이어가 결정해야 할 것은 블러핑을 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숫자로 블러핑을 할 것인가다.
 

 
이 게임에서 모험가가 건너는 다리는 10칸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주사위 수의 범위는 1~4, 따라서 다리를 건너기 위해 최소 3번의 차례가 필요하다. 확률상 한 번 정도는 X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어차피 거짓말을 할 거 제일 높은 4를 부르고 남들이 넘어가 주길 바라면 되는 거 아니냐 싶을 수도 있지만, 이 4라는 숫자는 플레이어들을 유혹한다. 똑같이 의심이 간다고 해도 1~2칸 전진을 막기 위해 자기 게임말 하나를 거는 것은 망설여지지만, 4칸 전진을 막는 것은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한 사람마다 가진 게임말은 7개다.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이 게임말 7개 중 1개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서 말 3개는 남겨놓아야 한다. 이론적으로 항상 정확한 타이밍에 상대를 의심할 수 있다면 거짓말을 무한대로 확인할 수 있지만, 매번 잘못 짚었을 경우를 가정하면 기회는 4번뿐이다. 여기에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4가 나올 확률보다 X가 나올 확률이 높다는 사실도 플레이어를 유혹한다. 이런 장치들이 블러핑을 두려워하는 플레이어도 블러핑을 하도록 만들고, 신중한 플레이어도 과감히 베팅을 하게 만든다.
 
이 난무하는 의심과 거짓이 3~4명 게임에는 시끌벅적한 파티 게임의 분위기를, 2명 게임에는 진지한 대결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알렉스 랜돌프 작가(오른쪽)가 AI 연구자 크리스토프 엔드레스(왼쪽)와 트윅스트를 막 시작한  모습.
 
<챠오챠오>는 2004년에 작고한 알렉스 랜돌프 작가가 만들었다. 평생 100개 이상의 보드게임을 만들어낸 그는 현대식 보드게임의 틀을 확립한 작가로 꼽히며, 사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이나 작품은 보드게임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알렉스 랜돌프 작가의 게임에는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와 게임들이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세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그의 삶과도 관계가 있다. 192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924년부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살았던 그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스위스의 기숙 학교에서 보냈고,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년기의 화려한 이주 경력과 지식을 열망하는 학구열이 겹쳐 그는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다국어 학생으로 자라날 수 있었는데, 그의 언어적 재능은 그를 자연스레 글쓰기의 길로 이끌었다. 어른이 된 그는 광고 카피라이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소설 등의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보드게임 작가로서의 길이 시작된 것은 좀 더 나중이다. 1961년에 그는 자신의 첫 상용 보드게임 <트윅스트>를 출시했다. 이 게임은 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2인 대결 게임이었는데, 게임의 진행 방식이 바둑의 행마와 매우 흡사하기에 바둑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후로도 그는 고전 게임을 기반으로 만든 전술적 대결을 선호하는 작풍을 유지했다. 그는 특히 체스, 쇼기, 포커 등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알렉스 랜돌프는 여전히 세계 시민이었는데, <트윅스트>를 발표하던 즈음에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고 그 직후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본에서 그는 쇼기(일본 장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1급 기사 자격을 따기도 했는데, 장기에 대한 관심과 일본의 목공 문화가 그의 게임에도 영향을 끼쳤다. 게임 구성물의 미적 디자인을 중시하고 고품질의 목재 구성물을 선호하는 것도 작풍의 두 번째 특징이다.
 
1970년 즈음 자신의 고향이자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인 베네치아로 이주한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전업 보드게임 작가로 살기로 마음먹고 보드게임 개발과 작가의 권리 신장에 몰두했다. <챠오챠오>는 바로 그 베네치아 시절에 탄생한 게임이다. 포커의 블러핑에서 기반한 구조와 눈을 사로잡는 정밀한 구성물 디자인 등, 아주 오랜 시간 유지해온 그의 작풍은 이 게임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수상 이력
2013 Japan Boardgame Prize U-more Award W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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