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스팬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짝 살펴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용스팬⟩의 번역자입니다. ⟨용스팬⟩은 베스트셀러 게임인 ⟨윙스팬⟩의 시스템을 활용한 첫 번째 외전 게임입니다. ⟨용스팬⟩은 드래곤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의 생물학을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이 세계의 드래곤을 연구하는 용류학자가 되어 학회에 그 성과를 제출하게 됩니다. 따라서 ⟨용스팬⟩은 각종 드래곤을 생물학적인 연구 대상으로 대합니다.
이는 명백히 동화적인 세계를 다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원작자들은 게임의 테마와 관련된 이곳저곳에 자유롭고 장난기 어린 상상을 잔뜩 표현해 놓았으며, 현실의 생물학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용스팬⟩ 한국어 번역은 이런 원작의 기조를 고려해 때로는 현실의 동물 명명법을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장난과 농담에 동조하기도 하며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러한 ⟨용스팬⟩의 번역, 특히 이 게임에 등장하는 183종의 드래곤들의 이름 번역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용스팬’이라는 게임 제목입니다. 원제 ‘Wyrmspan(웜스팬)’은 ‘Wingspan(윙스팬)’을 살짝 비튼 말장난입니다. 한국어판에서 ‘웜스팬’이 아니라 ‘용스팬’이 된 이유를 짚어 볼게요. 일단, 한국어에서는 ‘웜’보다는 ‘용’이 훨씬 더 명확하게 드래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판타지물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웜’이라는 말과 드래곤 그림의 연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용’이라는 말을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알 테니까요.
그리고 ‘웜’이라는 글자는 모양이 ‘윙’과 지나치게 비슷해 불필요한 혼동을 야기할 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용스팬’도 ‘웜스팬’ 못지않게 ‘윙스팬’의 말장난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제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드래곤의 이름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윙스팬⟩에서는 조류의 이름을 참조하는 효과가 있어서 이를 고려하여 번역을 진행해야 했는데요, 원 제작사는 드래곤의 이름은 게임에 활용되지 않으므로 자유롭게 번역해도 된다고 알려줬습니다. 이에 다음의 순서를 기준으로 삼고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원문입니다. 원문을 직역해 매끄럽게 한국어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번역자에게도 가장 수월합니다. 가령, ‘Tawny Steppe Wyvern’은 ‘황갈색초원와이번’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가상의 세계를 다룬 작품 속 드래곤의 이름을 번역함에 있어 원문의 직역을 딱딱하게 고수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풀어내거나 원문의 느낌을 살려 각색하는 편이 더 좋은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면 두 번째로, 게임에 포함된 또 다른 구성물인 드래곤 백과의 서술을 참고합니다.
드래곤 백과 항목에는 이름의 어원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헷갈리거나 잘못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서술도 있지요. 영어명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어색할 때, 백과의 설명을 보고 적절히 번역하였습니다.
가령, ‘Keen Criketcatcher’는 직역하면 ‘날카로운귀뚜라미잡이’인데, 뭐가 날카로운지 이름만 보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드래곤 백과의 설명을 보면 이 드래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무를 탑니다. 그런데 ‘날카로운발톱귀뚜라미잡이’는 너무 길고 어색하죠. 결과적으로는 그 생태에 대한 서술에 따라 ‘나무타기귀뚜라미잡이’가 되었습니다. (⟨윙스팬⟩의 새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한국어 생물종 명칭은 원칙적으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길면 길수록 읽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귀뚜라미잡이’는 이미 길죠!)
그리고 드래곤의 영어명에는 그 성격이 자주 들어갑니다. 가령 ‘Kind Mistvern’이라는 드래곤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친절한안개와이번’이 되는데, 한국식 생물종 이름이라고 치면 많이 이상합니다. ‘성질나쁜갈매기’라거나 ‘조심스러운구렁이’, ‘날렵한메뚜기’ 같은 생물명을 본 적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백과의 내용을 참조해, 그 습성에서 빌어온 ‘보모안개와이번’으로 정했습니다.
또 다른 고려점은 드래곤의 외형입니다. 원문이 한국어로 직역하면 어색하면서 동시에 백과의 설명과 별로 상관이 없을 경우 고려하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경우는 가급적 피하기 때문에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사실 실제 생물명 작명에 있어서는 대단히 현실적인 방향성이지만요). 가령, ‘Crafty Moray’의 Crafty는 재주 있는, 똑똑한, 교활한, 교묘한 등의 뜻이 있는 영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드래곤은 외형에서도 백과의 서술에서도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똑똑한 것인지 교묘한 것인지조차 말이죠. 그래서 이 드래곤의 이름은 고심 끝에 그 외형을 따라 ‘붉은배곰치룡’으로 정했습니다.
이제 드래곤의 유형을 살펴볼까요? 이 게임의 테마가 상상 속 생물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만큼, 드래곤들도 종류에 따라 분류군으로 나뉩니다. 비슷해 보이는 곤충도 나비나 나방으로 나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드래곤의 이름은 대부분 분류군을 수식하는 말과 그 분류군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표지를 장식한 드래곤인 ‘왕실와이번’을 보면, ‘와이번’이라는 분류군을 ‘왕실’이라는 말이 수식하고 있죠.
이런 분류군 중 드래곤(Dragon), 드레이크(Drake), 드라고넷(Dragonette), 웜(Wyrm), 와이번(Wyvern), 바실리스크(Basilisk), 코아틀(Coatl), 암피프테레(Amphiptere) 등은 전부 단순히 음차했습니다. 서로 구분해서 번역하기도 쉽지 않고, 상당수가 판타지를 다룬 창작물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들이라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기서 가장 낯선 표현은 아마 암피프테레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기호나 그림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아!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다리는 없고 날개만 있는 드래곤의 형태로 가문의 문장이나 지도 같은 곳에 자주 보이니까요. 이름부터 그리스어로 날개(Ptere) 2개(Amphi)라는 뜻입니다.
17세기 초, 암피프테레를 그린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반면 그 뜻을 따라 의역한 분류군으로는 용, 이무기, 비룡, 잉룡, 정룡, 초식룡, 요정용, 요정드래곤 등이 있습니다.
용의 원문은 ‘Lung Dragon’입니다. 동아시아의 전승에 나오는 용(龍)을 영어로는 ‘Lung(룽)’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당연히 한국어에서 이를 룽드래곤이라 지칭하면 안 되겠죠?
이무기의 원문은 ‘Serpent’입니다. 영어로 큰 뱀을 가리키는 말이고, 한국어에서는 용이 된다는 전승이 있는 이무기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이후 분류군들은 번역자의 창작이 필요했습니다. ‘비룡’은 보통 Drake(드레이크)의 번역어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는 ‘Flyer(나는 것)’라는 분류군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레이크는 음차하고, ‘Flyer’가 비룡이 됐습니다.
잉룡은 그 형태를 보면 알겠지만 잉어와 유사한 무늬를 갖고 있습니다. 원문부터 ‘Koiwyrm’, 즉 잉어웜입니다. 이를 좀 간략하게 하기 위해 한국어는 ‘잉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룡’은 ‘정령(Spirit)’의 말장난입니다. ‘초식룡’의 원문은 ‘Grazer’인데, graze도 뜻이 여럿인 단어이고 Grazer라 지칭되는 드래곤들의 공통점도 불분명했습니다. 이런 경우 원 제작사에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그래서 초식성 드래곤을 가리키는 말이 맞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요정용’과 ‘요정드래곤’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원 제작사의 답에 따르면, 없습니다. 그저 원문이 ‘Fae’와 ‘Feydragon’으로 나뉠 뿐입니다. 하지만 원문이 서로 다른 것은 명백하므로, 각각 번역 용어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원 제작사에서는 앞으로 확장을 만들더라도 드래곤 이름을 참조하지는 않을 거라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마지막으로, 말장난과 농담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어는 형태가 비슷한 어휘가 많은 특성 때문에 말장난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덕분에 번역자들은 머리가 아픈 일이 많습니다. ⟨용스팬⟩에도 이런저런 말장난이 들어갑니다. 이는 이 게임 테마가 생물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래도 상상의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한국어화 과정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고려해 일부는 그 말장난을 살리려 했습니다.
가령, ‘~용’ 시리즈가 있습니다. ‘아니용’, ‘빨라용’, ‘날래용’ 등. 이런 드래곤들의 이름 원문을 보면 굉장히 단순합니다. 가령, ‘빨라용’의 원문은 ‘Speedy Lung Dragon’, 즉 ‘빠른용’입니다. ‘날래용’의 원문은 ‘Swifty Lung Dragon’, 즉 이것도 ‘빠른용’입니다. ‘아니용’은 ‘Contrary Lung Dragon’, 즉 ‘반대용’입니다. 아마 영어권에서는 ‘Lung Dragon’이라는 명칭 자체가 특별하여 이것만으로도 그럴싸한 명칭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용은, 용이죠. 'Lung Dragon'이 '용'이 된 시점에서, 원문 그대로 직역을 해도 약간 우스꽝스럽거나 장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용'들을 일괄적으로 말장난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튀는 이름이 아마도 ‘지만알아용’과 ‘나만알아용’일 겁니다. ‘지만알아용’의 원문은 ‘Selfish Lung Dragon’입니다. 즉, ‘이기적인용’이죠. 백과 설명을 보면 어울리는 이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드래곤 종의 명칭으로는 어색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예를 생각해 보니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알던 거인(The Selfish Giant)⟩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를 참고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럼 ‘Yellow-bellied Lung Dragon’, 즉 ‘노란배용’은 왜 ‘나만알아용’이 되었을까요? 백과에 따르면 ‘나만알아용’은 ‘지만알아용’으로 의태하는 근연종입니다. 두 종 모두 배가 노랗지만, Yellow-bellied라는 표현에는 특별히 ‘겁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이 말장난을 살리기 어려웠습니다. 이 ‘지만알아용’의 농담을 살릴 겸, 그리고 두 종의 연관성을 강조할 겸 해서 ‘노란배용’이라는 명칭을 ‘나만알아용’으로 변경했습니다.
⟨용스팬⟩은 여러분을 드래곤이 가득한 환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가득한 게임입니다. ⟨윙스팬⟩에 색다른 변주를 준 이 재미있는 게임의 한국어판에도 많은 사랑을 쏟아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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