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필자는 20대까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30대 즈음부터는 보드게임 업계에 종사하며 20여 년간 덕업일치의 외길을 걸어왔다. 박지원이란 이름보다는 가이오트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보드게임 플레이어. 그의 반쯤은 사사로운 보드게임 이야기를 들어보자.
"실감나는 구성물들과 함께 즐기는 석기시대 체험"
다양한 보드게임을 모으고 즐기는 사람들이 때때로 마주치는 어려움이 있다. 바로 나의 보드게임 취향과 가까운 사람들의 보드게임 취향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 내 경우에는 최근에 정말 마음에 드는 게임을 구했지만 2년 가까이 지나도록 한 번밖에 해보지 못한 경험이 있다. 아무리 명작이고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그 게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좋아해야 의미가 있는 법. 준비된 플레이어가 대기 중인 보드게임 모임에서야 ‘생각할 거 많은 진검 승부 게임’이 최고겠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는 ‘초보자와도 공평하고 진땀 나는 한 판을 즐길 수 있는 접대용 게임’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설명하느라 진 빠지고 승부도 재미없으면 최고의 전략 게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카탄>, <카르카손>, <스플렌더>, <줄로레또> 같은 가벼운 전략 게임을 선호한다. 자원 관리, 다양한 득점 방법, 머리 써서 이기는 맛이 있는 데다가 설명만 잘한다면 처음 게임을 하는 사람과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게임들은 아무리 많이 모아도 다 쓸 데가 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되어야 2시간 동안 두뇌를 쥐어짜는 게임으로 넘어가기 위한 게이트웨이가 될 수 있다. 이보다 더 쉬운 캐주얼 게임 영역의 게임들도 있지만, 전략 게임으로 넘어가는 게이트웨이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내가 전략 게임 추천작으로 꼽는 비장의 게임 중 하나는 <석기시대>라는 작품이다.

석기시대의 게임판
일단 <석기시대>는 일러스트에서 먹고 들어간다. 게임판의 일러스트는 <석기시대> 부족민의 생활 터전이 묘사된 그럴듯한 그림이다. 풍경을 그려놓고 거기에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살짝 얹었다. 게임판은 여러 개의 행동 칸으로 쪼개져 있지만, 구역 나누는 선은 최소화되어 있고 예쁜 그림을 최대한 살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기가 불편한 것도 아니다. 이런 미와 기능을 완벽히 해결한 게임판 디자인은 흔치 않다.
많은 게임에서 자원을 나타내는 구성물은 보통 색이 다른 큐브나 디스크다. 큐브와 디스크 정도면 기능적인 면에서 충분하기 때문이지만 그건 보드게임에 닳고 닳은 사람들을 위한 거고 초보 지향의 게임일수록 추상이나 상징 같은 것은 없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아그리콜라>나 <카베르나> 같은 게임이 꽤 어렵고 복잡하지만 세팅 사진을 보면 초보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꽤 많다.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니까. <석기시대>의 자원 토큰 구성물은 일단 합격점 이상이다. 나무는 나무처럼, 흙벽돌은 흙벽돌처럼, 돌은 돌처럼, 금은 금처럼 생겼다.

흙벽돌처럼 생긴 흙벽돌
초보자들은 규칙이 간단한 게임을 선호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규칙의 두께보다는, 게임 중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그보다 좀 더 중요하다. 이게 이해가 되면 규칙이 많아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석기시대>는 이 점에서 탁월하다. 게임의 스토리와 규칙이 잘 맞물려 있고 어떻게 해야 점수를 얻을 수 있을지도 쉽게 알 수 있다.
부족민을 여기저기에 보내서 이것저것을 얻는 게임, 점수를 많이 먹으면 승리. 식량 없으면 감점 많이 받으니 주의. 게임의 스토리는 이것으로 요약된다. 각 칸의 기능 또한 칸에 심볼 등으로 이해가 잘되도록 꾸며져 있다.
1) 사냥: 감점을 피하기 위해 식량을 얻는 칸. 투입한 부족민 수만큼 주사위를 굴릴 수 있고 숫자가 크면 식량이 더 많이 나옴.
2) 자원: 나무, 흙벽돌, 돌, 금 등 자원을 얻는 칸. 투입한 부족민 수만큼 주사위를 굴리고 숫자가 크면 자원이 더 잘 나옴. 고급 자원일수록 얻기 어려움. 자원은 점수를 얻기 위한 수단.
3) 오두막: 부족민 2명을 투입하여 추가 부족민 1명 획득하여 다음 차례부터 사용 가능. 노동력이 느는 만큼 중요한 칸.
4) 도구: 자원이나 사냥할 때 주사위 숫자를 보정해주기 위한 곳. 주사위 6만 굴릴 자신이 있다면 투자 안 해도 무방.
5) 농업: 식량을 일부 만들어주는 칸. 지속해서 투자하면 효율이 높아져 사냥을 적게 하고도 식량 문제 해결 가능.
6) 건물: 건물에 그려진 자원 내고 건물 가져가는 칸. 건물은 사용 자원의 가치만큼 점수가 나옴.
7) 문명: 자원 내고 카드 사는 칸. 카드는 점수 기능과 함께 몇몇 추가 효과가 있음.
놀랍게도 이게 규칙의 대부분이다. 나머지도 게임판의 각 칸에 그려진 심볼 보면 생각나는 그런 디자인이다. 게임 내에 효과를 설명하는 문구는 전혀 없고 모두 아이콘화되어 있으며 아이콘도 이해하기 쉽다.
사냥의 효율이나 자원 채집의 효율을 결정하는 것은 주사위다. 부족민을 여럿 보낼수록 효율은 높아지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고민이 된다. 자원 캐라고 보낸 부족민이 종종 밥값을 못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대성공을 하기도 한다. 확률과 기댓값의 문제이니 합리적인 선택으로 극복할 여지는 있지만 비합리적인 선택의 초보자가 잭폿으로 역전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게임이 쉽기에 초보자와 경험자의 선택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아서, 끝나고 나면 “그때 주사위 1만 더 나왔으면” “저 때 여기다가 1명 더 보냈어야 했어” 하는 정도로 복기하게 된다. 주사위 굴리는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사위 컵이 들어있다. 주사위 컵 같은 도구는 도박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게임에서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컵이 석기 시대 도구 같은 느낌을 주어 잘 어울린다.

석기시대의 주사위 컵
이 게임을 만든 베른트 브룬호퍼 작가는 보드게임 개발사 한스 임 글뤽의 창업자이며 게임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좋은 게임을 알아보는 재능과 함께 작가의 아이디어에 마법 같은 양념을 쳐서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능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작가 라이너 크니치아가 한스 임 글뤽을 통해 낸 게임에 명작이 많은데, 이들을 알아보고 함께 만든 사람이 바로 베른트 브룬호퍼이다. 1개 팀 규모에 불과한 한스 임 글뤽이 명작의 산실이 되며 독일 보드게임 업계의 작은 거인이 된 것은 상당 부분 베른트 브룬호퍼의 안목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태이다.
베른트 브룬호퍼는 보드게임 작가로서도 활동하여 2개의 굵직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는데 하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고 나머지 하나는 <석기시대>이다. 베른트 브룬호퍼의 2대 명작은 출시된 해에 최고 기대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평가가 점점 좋아졌다. 특히 생각보다 입문 문턱이 낮으면서 최소한의 머리 쓰는 재미를 보장하기에 초보자에게 설명해서 게임 하는 상황이 잦은 사람들에게는 필수 게임이 되었다.

게임이 진행 중인 모습
<케일러스>와 <아그리콜라>가 큰 성공을 거둔 이래 돌아가며 일꾼 1개를 액션 칸에 놓고 해당 칸의 액션을 하는 일꾼 놓기 방식의 게임 시스템은 액션과 자원 배분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게임 시스템으로 작가들에게 인정받아 너도나도 사용하는 게임 시스템이 되었다. <석기시대>가 바로 이 일꾼 놓기 방식의 게임이다. 말하자면 석기시대에 익숙해지면 다른 전략 게임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꾼 놓기 방식이 주류인 시대에 입문용 게임으로 <석기시대>의 가치는 더욱 크다. 나는 <석기시대>에서 고전 명작 <카탄>이나 <카르카손> 정도의 파괴력을 느낀다.
<석기시대>는 이전에 한국어판이 발매된 후 특히 초보자와 같이할 수 있는 쉬운 전략 게임을 찾는 분들에게 권할 수 있는 좋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리 못해도 100점 정도는 나오는 후한 점수 체계는 초보자에게도 상당한 성취감을 준다. 실제로 해 보면 ‘쉬운 일꾼 놓기 게임 + 주사위 운빨’로 치부할 수 없는 이 게임의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석기시대>가 다시 나올 때가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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