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4세 이상│1~5명│120분
"강렬한 서사 속에 숨은 블랙 조크"
B급 정서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며>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 영화계는 ‘대작주의’라는 신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대형 산업의 체계를 따르게 되면서 모든 극장 영화는 A급 영화와 B급 영화가 철저하게 분류되었다. B급 영화는 A급 영화 상영 전에 자투리 시간을 메우기 위해 상영되거나, 혹은 동시상영이라는 형태로 저렴한 가격에 상영되고는 했다. B급 영화는 제작자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감독에게 별로 간섭하지 않았고, 어떤 감독들은 괴이하거나 실험적인 영화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SF, 공포 등의 소재가 이 당시 B급 영화들에서 자주 사용되던 것들이다. A/B급 영화의 체계는 1950년대 이후 사라졌지만, 그 시대의 B급 영화 정서를 물려받은 작품들이 후대의 감독과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은 1970년대 이후 빠르게 하나의 문화를 구성해냈다. 오늘날 ‘걸작 B급 영화’라는 괴상한 용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이유다.
심야영화, 동시상영, 저예산과 조악한 분장 및 세트 등은 B급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호출하는 말이 되었다. 그들이 그 말들로부터 떠올리는 것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 탄생하는 뛰어난 꼼수, 정말 엉터리지만 보는 이를 껌뻑 죽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화성을 개척하는 게임?
B급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는 사소한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테라포밍 마스>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같은 것이다. 이 게임에는 B급 SF 영화의 향취가 잔뜩 묻어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인 유사성 때문에라도, <테라포밍 마스>의 박스 분위기를 보고 영화 <마션>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테라포밍 마스>는 SF 영화, 혹은 여러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인 ‘화성 테라포밍’을 소재로 한 게임이다. 가까이는 <마션>이 있으며, <테라포마스>라는 만화도 있다. 이 주제는 20세기 말부터 여러 작품의 소재로 등장했지만, 보드게임으로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테라포밍은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의 환경을 지구와 비슷하게, 정확히는 지구인의 생체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제목 때문에 흔히 ‘화성을 개척하는 게임’이라고 소개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게임을 해보고 나면 그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영화 <마션>을 오마주한 듯한 일러스트나 카피를 보면 희망을 향한 개척 게임이라고 느끼기 쉽지만, 사실 이 일러스트와 카피는 개발자의 장난에 가깝다. 더구나 일러스트는 <마션>을 오마주한 것처럼 보이면서 다른 것을 숨겨 넣으려 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테라포밍 사업에 기여하는 모든 회사와 기업은 테라포밍 위원회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 <테라포밍 마스> 규칙서 2p 중에서.
자, 그러면 박스를 열고 게임을 시작해보자. 우선 게임의 목적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게임의 목적, 즉 승리 조건은 화성을 잘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화성을 개척하는 것은 실은 승리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게임이 종료되는 조건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의 역할은 지구 연합도 아니고, 희망을 찾아 달리는 과학자도 아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나 국가·집단의 리더가 되어, 화성 개척 사업을 통해 세계 정부의 지원금을 타내고 자신의 생산력과 이윤율을 높여야 한다. 물론 화성에 자기 땅을 많이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화성 테라포밍 사업이 끝나는 시점에서, 가장 사업 성과를 크게 낸 사람이 승리한다. 물론 테라포밍도 열심히 해야 한다. 테라포밍에 기여할수록 지원금에 의해 자금 생산력이 늘어나며, 어떤 사업들은 테라포밍 지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구급 경영 시뮬레이션
플레이어들은 모두 하나의 기업, 혹은 국가, 혹은 거대 조합이 되어(편의상 기업으로 통칭) 게임을 시작한다. 각각 기업 카드를 한 장씩 가지게 되며, 카드에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사업 어드밴티지와, 그 기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기업들이 테라포밍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당연하게도 모두 세속적인 이유이며, 모두가 이 사업 참가를 일종의 투자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테라포밍 마스의 게임판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사업의 관점에서 보게된다. 이 게임은 끊임없는 투자의 연속이며, 경영자의 판단에 따라 거대 기업이 변모하는 게임이다. 화성에 산소를 늘리거나 녹지를 만들 때마다 올라가는 TR(Terraform Rate) 지수도 단순히 업적 기록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적용되는 기업의 가치 혹은 평가액이 된다. 당연히 투자란 기본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을 포함한 말이다. 초반부터 가진 것을 모두 털어 테라포밍 사업에 투자했다가는 기업을 키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에 이기기 위해 어디에 어떤 투자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테라포밍 사업은 물론이고, 자기 기업의 기술에 대한 투자, 정책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 물론 시간과 자금은 한계가 있으므로, 선택이 필요하다. 투자는 크게 세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정책 투자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기업상(賞) 제정이다. 플레이어는 특정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다다른 기업에게 수여하는 이 상의 수상 조건 결정권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기업상은 세 개의 기업에게만 수여되며, 게임 종료 시점에서 상당한 점수가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수상 조건이 결정되도록 일찍 선점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대한 투자에 반드시 자신이 그 상을 받으리라는 법은 없다.

플레이어는 총 5개 부문의 기업상을 제정할 수 있다.
기술에 대한 투자는 대체로 특정 자원의 생산력을 높이거나 자원에 의한 이윤 발생량을 높이는 것이지만, 미생물이나 동식물, 바이러스 등의 연구를 통해 기술력 자체를 높이는 종류도 있다. 연구 성과를 가로채거나 해킹을 하는 등 다른 기업을 공격하는 기술도 존재하지만 이 게임의 승패는 결국 생산성에 따라 큰 차이가 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기술 투자는 플레이어들의 손에 있는 프로젝트 카드들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카드는 게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누가 게임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플레이는 이 카드를 사용하는 행동이 주가 되겠지만, 이 카드가 게임의 핵심이라는 의미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련번호 1번부터 208번까지의, 모두 전혀 다른 내용의 카드가 준비된 이유는 단지 다양한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설정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테라포밍 마스> 는 스토리 설정을 구구절절 규칙서에 써넣는 대신, 기업들의 관계와 사건들의 배치를 통해 플레이어가 서사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붉은 화성 연작
규칙서의 마지막 부분을 유심히 읽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게임에서 이와 같은 구절을 읽게 될 것이다.
"이 게임에 큰 영감을 준, SF소설 시리즈의 작가 Kim Stanley Robinson씨께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화성과 그 외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께도 무궁한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큰 의미 없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 <테라포밍 마스>가 위 구절에서 언급된 <붉은 화성> 시리즈(붉은 화성, 녹색 화성, 푸른 화성으로 이루어진 3부작. 흔히 화성 3부작이라고 불린다)로 부터 받은 것은 영감 정도가 아니다. 90년대 이후의 수많은 SF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테라포밍 마스>는 화성 3부작의 팬 픽션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깊이 영향을 받았다. 특히 ‘마스 사가(Mars Saga)’라고 불릴 정도로 장대한 화성 3부작 중에서도 첫 번째 권인 <붉은 화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붉은 화성>은 ‘The First Hundred’로 불리는 100명의 초기 정착민들이 화성에 첫 식민지를 구성하는 것으로 시작해, 지구와의 갈등 끝에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UN과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화성이 군사적으로 점령되기까지의 35년간을 그린 내용이다. 테라포밍 사업이 진행된 결과 이 소설의 결말에서 찾아온 것은 낭만과 희망의 풍경은 아니다. 우주 엘리베이터가 파괴되고 화성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며, 포보스 위성은 무기화된다.
<테라포밍 마스>의 기업 카드들을 하나씩 천천히 들여다보면 <붉은 화성>의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세계 정부 산하 기구인 ‘UNMI’는 <붉은 화성>에 나오는 ‘UNOMA’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국적 기업들이 주축이 된다는 설정 역시 <붉은 화성>의 영향일 것이다. 물론 <테라포밍 마스>가 <붉은 화성>처럼 철학적이거나 치열한 내용은 아니다. <붉은 화성>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 주제를 블랙 조크 수준으로 풀어냈다. 이를테면, <붉은 화성>을 B급 정서로 패러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 3부작의 외전 격인 단편집 의 영국판 표지. 어쩌면 테라포밍 마스의 표지는 이것의 오마주일지도 모른다.
<테라포밍 마스> 속 기업 카드 간의 관계는 어떤 서사를 상상할 수 있게 잘 짜여 있으며, 프로젝트 카드들은 하나의 세계에 대한 208페이지짜리 설정집에 가깝다. 만약 208장의 카드를 일련번호 순서대로 책 읽듯이 정독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방금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그럴듯한 설정집을 읽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이 설정집을 이야기로 완성시켜주는 것은 플레이어와, 프로젝트 카드마다 하나씩 포함되어 있는 플레이버 텍스트다. 플레이버 텍스트는 당신이 주인공인 이 B급 영화의 내레이션 역할을 하며,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신나게 화성을 주물럭거리는 당신을 틈틈이 비아냥거릴 것이다. 물론 그 비아냥은 ‘사회파 영화’의 수준까지 가지 않고 블랙 조크의 수준에서 멈추도록 배분이 잘 되어 있다. 당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과 프로젝트 카드를 통해 낭독되는 친절한 내레이션들은 이 게임을 서사적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서사에 첨가된 마지막 향신료, 프로젝트 카드마다의 개성적인 이미지는 이 게임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백미다. 1번부터 208번까지 나뉜 프로젝트 카드들은 하나하나마다 별도의 이미지가 있다. 이 이미지들은 정말 훌륭한 엉터리다. 어떤 것은 사진이고 어떤 것은 그림이며, 어떤 것들은 사진을 대충 합성했고 어떤 것들은 대충 구글 검색으로 아무 이미지나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 제멋대로이고 엉터리에다 저예산 느낌의 일러스트들은 B급 영화가 가진 조악함의 미학을 느끼게 해준다.

테라포밍 마스의 기업 카드와 프로젝트 카드
누가 해도 재미있다
물론, 게임에서 서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B급 영화의 풍미라거나, 유명한 SF 소설의 오마주라거나, SF 팬이자 과학자인 작가가 만든 SF 게임이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시스템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이 게임은 재미있다. 카드를 통해 일어나는 연쇄작용과 자신만의 조합을 만들어나가는 디테일한 재미는 이 게임의 디자인에서 풍겨나는 B급 감성과 달리 매우 깔끔한 시스템으로 완성되어 있다. 마치 세월이 지나 대작으로 리메이크된 B급 걸작 영화처럼 말이다. 사실 이 게임은 누구든 즐길 수 있다. 물론 그중 어떤 사람들은 괜히 B급 영화를 보고 싶어질 것이다.
글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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