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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의 위즈스톤 시리즈
코리아보드게임즈
2023-05-31

 

2023년 5월 27일 토요일,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렌탈 스튜디오 LES601에서는 코리아보드게임즈의 다섯 번째 크리에이터 데이가 열렸다. 매월 열린 크리에이터 데이 가운데서도 이날 행사는 유례 없이 특별한 자리였다. 생애 대부분을 바둑과 함께 보낸 프로 기사, 그리고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치열한 승부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 이세돌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보드게임 작가라는 생소한 영역으로 데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위즈스톤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는 이세돌 작가

 

이날 이곳에서는 위즈스톤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세돌 작가의 게임 3종, <그레이트 킹덤>, <킹스 크라운>, <나인 나이츠>가 첫선을 보였다. 여느 장르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유명인을 동원한 뜬금없는 마케팅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3종의 게임은 이세돌 작가가 20여 개월간 직접 바둑알과 동전에 스티커를 붙여가며 지인들과의 테스트 플레이를 통해 개발해 왔고 코리아보드게임즈와의 오랜 협업을 통해 상품화한, 말 그대로 데뷔작이다.

 

이세돌 작가가 그레이트 킹덤 다면 대국을 하고 있는 모습

 

편의상 보드게임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묶이긴 하지만,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현대의 보드게임과 오랜 옛날부터 전래되어 온 바둑은 추구하는 바도, 재미의 방향도 엄연히 다르다. 그러니만큼 이미 수많은 보드게임에 도가 튼 보드게임 크리에이터들의 행사에서 직접 게임을 소개하고 함께 체험하는 등의 첫 데뷔를 치른 것은 이세돌 작가로서도 상당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세돌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이 그만큼의 무게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렇다.

 

위즈스톤 시리즈 그레이트 킹덤, 킹스 크라운, 나인 나이츠

 

전직 바둑 기사가 현대 보드게임 작가로 데뷔한 것은 어찌 보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이날 이세돌 작가가 선보인 3종의 게임은 그야말로 이세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게임들이었다. 바둑을 압축해 놓은 듯한 추상전략게임 <그레이트 킹덤>, 예측 불가능성과 추론의 영역이 이리저리 뒤섞인 <킹스 크라운>, 추리 대결과 심리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때로는 버림돌 전략으로 상대를 유인해야 하는 <나인 나이츠>, 모두가 현대 보드게임의 전제를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바둑의 지략적 묘가 담뿍 배인 게임이었다. 이날 선보인 3종의 게임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레이트 킹덤

 

"바둑에 있어 가장 어려운 개념이 바로 ‘두 집’이라는 개념입니다.

'완생은 두 집이 났다', '미생은 두 집이 안 났다'라는 원리인데 말은 쉽지만 이걸 이해하는 과정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두 집'이라는 개념을 사방을 막는 개념으로 단순화해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게임판은 9줄(총 착점 81개), 돌은 각 40개(총 80개)로 기본 세팅을 한 뒤, 정중앙은 선공과 후공 어느 쪽에나 소속될 수 있게 하여 돌 수와 착점 수를 맞췄습니다. 여기에 상대방 성을 하나라도 파괴하면 게임에서 즉시 승리한다는 점 또한 이 게임이 가진 바둑과의 차별점입니다.

<그레이트 킹덤>은 바둑의 매력을 최대한 유지하되 진입장벽을 한결 낮춰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게임입니다. 저처럼 바둑을 오랜 기간 두었던 숙련자도, 바둑의 개념을 처음 접하는 입문자도 이 게임을 통해 생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 이세돌 작가

 

<그레이트 킹덤>은 위즈스톤 3종 중에서도 가장 바둑을 연상시키는 게임이다. 각자 게임판 위에 자기 성을 늘려가면서 영토를 확보하고, 상대의 성을 포위하거나 포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각자 한 가지 색깔의 성을 모두 가져가고, 차례마다 자기 성을 하나씩 게임판에 올려놓거나 패스를 선언하고 차례를 넘긴다. 플레이어의 목적은 영토를 확장하는 것으로, 게임판 위에서 자기 성이 상하좌우 빈틈없이 둘러싼 모든 칸을 영토라고 부른다. 적은 수의 성으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데, 게임판 중앙에 있는 중립 성이나 게임판 가장자리를 잘 이용하면 적은 수의 성으로 영토를 만들 수 있다.

 


 

특정 영역을 빈틈 없이 둘러쌌더라도 그 안에 상대의 성이 하나라도 있다면 영토로 인정되지 않는다. 어떤 영역을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영역에 반드시 상대의 성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단, 상대의 성을 상하좌우 빈틈없이 내 성으로 둘러쌌다면 즉시 상대의 성이 파괴된다.

 

게임은 서로 번갈아 가며 차례를 진행하다가, 두 플레이어가 연달아 패스하거나 게임판 위의 성이 하나라도 파괴되면 종료된다. 누군가 상대의 성을 파괴해서 게임이 끝났다면 성을 파괴한 플레이어가 승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각자의 영토 개수를 세어 승패를 판정한다. 이 경우 선공 플레이어가 후공 플레이어보다 영토를 2개 이상 더 확보했다면 선공 플레이어가 승리하고, 그렇지 않다면 후공 플레이어가 승리한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게임이 바둑의 '집' 개념을 축약한 게임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레이트 킹덤>의 개발 목표 자체가 이 '집'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바둑 고유의 재미를 살리면서 더 접근하기 쉬운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세돌 작가는 바둑의 진입장벽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개념이 '두 집'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바둑에서는 집을 짓는 데 성공하더라도 상대가 내 집 안에 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분리된 두 집을 만들지 못하면 돌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데, 이 개념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아예 상대방의 집 안에 돌을 놓을 수 없는 방향의 바둑을 고민하게 되었고, 첫수의 가능성을 줄여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향에서 게임판을 9줄(총 착점 81개), 돌은 각 40개(총 80개)로 설계했다. 돌의 수와 착점의 차이는 정중앙에 중립 성을 놓는 것으로 해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 성을 하나라도 파괴하면 즉시 승리한다는 규칙을 추가해 바둑과는 다른 방향성을 만들어 냈는데, 이 규칙은 작가가 어린 시절 가끔 두었던 '돌이 단 하나도 죽으면 안 되는 바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레이트 킹덤>은 기본적으로 바둑의 매력을 살려 만든 게임이지만, 승리하기 위한 전략의 측면에서는 제법 다른 게임이다. 따라서 이미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도 <그레이트 킹덤>만의 색다른 전략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바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낮은 진입장벽으로 조금 더 수월하게 바둑의 개념을 익히고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킹스 크라운


"<킹스 크라운>은 바둑과 빙고의 특성을 결합한 게임입니다. 사실 바둑과 빙고는 특징이 많이 다른 게임입니다. 바둑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고 철저한 계산과 수읽기에 근거하여 수를 놓는 반면, 빙고는 공개된 정보가 거의 없고 승패를 요행에 맡기는 게임입니다.

<킹스 크라운>에서는 정보가 완전한 공개도 비공개도 아닌 상태로 게임을 시작합니다. 상황에 따라 거의 대부분의 숫자를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기억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보를 완전히 알고 플레이하기는 어렵습니다.

플레이어는 상대 패의 일부를 알고, 상대가 놓은 수를 통해 남은 패를 짐작하여 전략을 구상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계산과 수를 읽는 능력이 필요하지만, 어림짐작으로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깊은 사고를 통해 느끼는 재미와 요행을 노리고 도전하는 재미가 조화롭게 섞인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서 제작한 것이 <킹스 크라운>입니다. 이 게임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제가 이 게임을 통해 경험했던 즐거움이 여러분께도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 이세돌 작가

 

<킹스 크라운>은 다섯 줄을 연결하는 빙고 게임에서 착안한 게임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목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우노>나 <루미큐브> 같은 현대 보드게임을, 또 어떤 부분은 메모리 게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전 게임의 특색과 현대 게임의 특색이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면서도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는 게임이자, 위즈스톤 3종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게임이다.

 

게임은 크게 가져오기 단계와 놓기 단계로 나뉜다. 가져오기 단계는 나에게 필요한 숫자칩을 획득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획득한 숫자칩을 게임판 위에 번갈아 가며 올려놓는 단계다. 큰 틀에서만 보면 익숙하지만 세부적인 진행 과정이 특이하다. 

 


먼저 가져오기 단계에는 번갈아 가며 필요한 숫자칩을 가져오는데, 이 가져오는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다. 자기 차례에는 먼저 숫자칩 2개를 앞면으로 공개하고, 숫자칩 1개를 획득한 후, 앞면으로 놓인 숫자칩을 모두 뒷면으로 돌려놓는다. 공개 방법은 두 가지로, 주머니에서 숫자칩 1개를 뽑아 공개하는 방법과 테이블 위에 뒷면으로 놓인 숫자칩 중 1개를 뒤집어 공개하는 방법이 있다. 이때 숫자칩 두 개를 모두 같은 방법으로 공개해도 되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하나씩 공개해도 된다. 

 

획득할 때도 자유도가 높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에 공개한 숫자칩 중에서만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뒷면으로 놓인 숫자칩을 가져와도 되고, 주머니에서 무작위로 뽑아도 된다. 숫자를 눈으로 보고 가져갈 수도 있고 기억에 의존해 고를 수도 있고 아예 운에 맡길 수도 있는 셈이다.

 


두 플레이어가 각각 12개의 숫자칩을 확보한 상태라면 놓기 단계로 넘어간다. 놓기 단계에는 번갈아 가며 숫자칩을 게임판에 올려놓는데, 이때는 시작 플레이어의 첫 차례를 제외하고는 이미 게임판에 올라가 있는 숫자칩에 인접하게만 놓을 수 있다. 이때 올려놓는 숫자칩은 인접한 숫자칩과 같은 색이면서 연속된 숫자이거나, 다른 색이면서 같은 숫자여야 한다.

 

이렇게 규칙에 따라 번갈아 가며 숫자칩을 올리다가 먼저 5줄의 빙고를 완성한 사람이 승리하며, 빙고를 누구도 완성하지 못하고 게임이 끝났다면 가장 마지막에 숫자칩을 올린 사람이 승리한다.

 


만들어진 결과물로는 빙고보다 오목에 가깝게 느껴지긴 하지만, <킹스 크라운>은 바둑과 빙고가 가진 차이점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게임이다. 이세돌 작가는 어느 정도 진입장벽이 있는 바둑과 달리 빙고는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두 게임의 결합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두 게임의 어찌 보면 상극에 가까운 특징이 서로를 상호보완하도록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세돌 작가가 판단하기에 바둑의 특징은 모든 정보가 공개된 채 철저한 계산과 수읽기로 진행된다는 점이었고, 반대로 빙고의 특징은 공개된 정보 없이 요행을 바라는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킹스 크라운>에서는 정보가 완전히 공개된 것도, 그렇다고 모두 비공개인 것도 아닌 상태로 게임을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대부분의 숫자가 일시적으로 공개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그 정보를 게임에 적용하려면 공개되었던 숫자를 모두 기억해야 하기에 기억의 오차에 따라 불완전한 공개 상태로 남게 된다. 게임 내내 기억력과 게임판 위의 상황에 따라 상대의 남은 수를 추측하고 전략을 구사하면서 때로는 요행을 노려야 하는데, 이 지적 싸움과 비논리적 투기 사이의 밸런스가 절묘하다.

 

나인 나이츠

 

"바둑에는 ‘단’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단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로, 1단부터 시작해서 9단이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단의 고저가 곧 실력의 절대적인 지표가 아니며, 단이 낮은 기사가 자신보다 단이 높은 기사를 상대로 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자기보다 1단 높은 상대에게는 물실호기(勿失好機)의 자세로 임하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인 나이츠>를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에는 숫자 1부터 9까지를 지닌 9명의 기사 말이 등장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1단 아래의 상대에게는 전투에서 지게 되므로 숫자가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저는 9개의 숫자가 그저 줄 세우기식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가지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나인 나이츠>입니다.

이 게임은 한 판만 해 봐도 규칙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심리전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추론을 통해 승리를 쟁취해보시길 바랍니다."

- 이세돌 작가

 

<나인 나이츠>는 각자 목적지가 다른 기사 말을 움직이며 상대방의 기사 말과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기사 말이 하나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승리하기 때문에, 내 기사 말의 목적지는 숨기고 상대방 기사 말의 목적지를 추리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각자 상대에게 보이지 않도록 자기 기사 말에 임무 토큰을 하나씩 끼우는데, 이 임무 타일에 적힌 숫자는 그 기사 말이 도착해야 할 목표 지점이자 그 기사 말이 가진 공격력, 그러니까 일종의 기사 레벨이다.

 


차례마다 번갈아 가며 자기 기사 말 하나를 한 칸 움직이는데, 자신의 다른 기사 말이 있는 곳으로는 움직일 수 없으며, 상대 기사 말이 있는 칸으로 움직이면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면 두 기사 말의 임무 토큰을 공개하고 숫자 크기에 따라 전투 결과를 판정하는데, 이 판정이 조금 독특하다. 기본적으로는 숫자의 크기가 큰 기사 말이 승리하지만, 숫자가 정확히 1 차이 나는 경우에는 오히려 낮은 숫자의 기사 말이 승리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기사 말은 게임판에서 빠지게 되며,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플레이어는 전투의 결과로 자기 기사 말이 퇴장하면 아직 게임판에 올라오지 않고 대기 중인 기사 말 하나를 새로 소환한다. 단, 대기 공간에 남은 기사 말이 없다면 소환할 수 없다. 

 

이렇게 진행하다가 기사 말 하나가 자기 임무 토큰과 같은 숫자의 목표 토큰에 도착하면 그 기사 말의 주인이 승리하고 게임을 종료한다. 자기 임무를 완수한 기사 말이 없더라도, 누군가 자기 차례에 더 이상 기사 말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상대편이 승리하고 즉시 게임이 승리한다.

 


게임에 익숙해졌다면 상대방의 기사 말을 내 편으로 만드는 포섭 규칙을 적용해 플레이해도 된다. 이 규칙을 적용한 경우에 같은 종류(기사 말에는 아처, 워리어, 레인저의 세 종류가 있다.)의 기사 말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에서 승리한 플레이어가 패배한 기사 말을 차지한다. 이렇게 차지한 기사 말은 전투에서 승리한 플레이어의 대기 공간에 놓고, 이후 기사 말끼리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소환할 수 있다. 이렇게 포획한 기사 말은 그 기사 말이 가진 임무 토큰을 포함해서, 자신의 다른 기사 말과 똑같이 취급한다.

 

전투 승패 판정에서 숫자가 1 차이 나는 경우 더 낮은 숫자가 승리한다는 점이 독특한데, 이세돌 작가는 이 규칙의 아이디어를 바둑의 '단'에서 얻었다고 한다. 바둑에서 프로 기사는 1단부터 시작해서 9단까지의 등급을 부여받는다. 몇 단인지가 실력의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높은 단의 기사가 더 실력이 뛰어나다는 인식이 있다. 물론, 낮은 단을 가진 기사가 높은 단을 가진 가시를 상대로 이기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자기와 차이가 가장 적게 나는 1단 높은 상대와의 대결은 어떤 경우보다 더욱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고 한다. <나인 나이츠>에서 숫자가 1 차이 나는 경우의 전투 승패 판정 규칙은 실제 프로 기사들의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다른 2종의 게임에 비해 이 게임은 추리 및 심리전의 요소가 강하다. 상대방의 기사 말이 어디를 목표로 하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고, 반대로 상대방이 내 기사 말의 임무를 오판하게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숫자가 높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 아닌 만큼 전투에서의 변수가 많다는 점도 이 심리전 요소를 한층 더 높여준다.

 

보드게임 작가 이세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드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긴 해도 현대의 상용 보드게임과 바둑으로 대표되는 고전 보드게임은 많이 다르다. 눈에 보이는 가장 명확한 차이는 아무래도 규칙서의 유무일 것이다. 상용 보드게임에는 플레이어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정한 완결된 규칙서가 포함되어 있고, 고전 보드게임은 그런 규칙서가 없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유명한 고전이라면 협회 등의 기관이 만들어져 공식 규칙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게임이라면 대개 규칙이 단체나 나라별로 다르기도 하고 설사 통일되어 있다 한들 ‘게임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종이 한 장의 차이 같지만, 게임에 규칙서가 포함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상용 게임과 고전 게임의 성질을 다르게 만든다. 게임에 규칙서가 포함되는 것은, 그 게임이 완결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완결이라는 것은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완결을 의미할 뿐이다.

 

구전 게임은 인간의 손과 입을 통해서 대를 잇기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재미없는 규칙은 버려지고 재미있는 규칙은 살아남는 방식으로 계속 고쳐진다. 인간이 환경이고 게임이 생물인 셈이다. 18세기의 바둑과 20세기의 바둑은 규칙이 다르지만, 그 어느 것이나 바둑이다. 완결되지 않고 계속 덧입혀지고 변형되는 게임에는 역사가 남는다. 그리고 그 반상의 플레이 역사 또한 기보와 경험이 되어 남으며, 이 기보와 규칙은 서로 영향을 주며 역사를 축적해 간다. 

 

충분한 역사를 가진 게임에는 특유의 습성과 가치관, 미학과 철학이 생성되기 마련이며, 그것은 곧 독립된 하나의 문화가 되며, 그 시점에서부터는 게임의 영역에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 바둑이라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2016년, 알파고의 등장은 바둑이라는 문화를 어느 정도 다시 게임의 영역으로 돌려놓았다. 인공지능이 프로 기사를 상대로 74전 73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전적을 거두면서, 바둑에서 인간의 직관이라는 영역에의 믿음이 깨지고, 결국 정확한 계산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믿음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이 바둑에서 인간의 시대가 종료되었다는 선고가 되지는 않았고, 바둑이 '문화'의 영역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된 것도 아니다. 2016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안긴 1패라는 전적이 물음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알파고도 이세돌도 바둑계를 떠나면서 이 물음표는 완결되지 않은 역사로 남았다.

 

보드게임 작가로의 첫 걸음을 내딛은 이세돌 작가

 

이런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이세돌이 보드게임 작가로 돌아온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놀랍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그럴싸한 일이다. 새로운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거창하게 말하면, 바둑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세돌 작가는 처음 바둑을 시작했을 때, 그것을 확률을 따지는 게임이 아니라 창의성을 따지는 예술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승부, 홀로 공부하고 깊이 상상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바둑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가면서 바둑은 확률을 따지는 집단 연구의 대상이 되어갔고, 그런 변화를 눈앞에서 보면서 점점 그 믿음은 약해져 갔다. 결정적으로 그를 흔들어 놓은 것은 알파고였다.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그에게 '바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안겼다. 그리고 그 물음은 그를 바둑의 기원으로 돌아가게 했다. 처음 바둑이 만들어졌을 때, 바둑은 과연 예술이었는가? 그저 게임 하나가 만들어진 것일 뿐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거듭하면서, 그는 점점 보드게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둑의 매력을 충분히 담아내면서, 바둑보다 접근하기 쉬운 보드게임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바둑의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자기만의 개성을 담은 보드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것으로 더 나아갔다. '예술로서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에서 '게임을 만드는 예술가'로 발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명작 보드게임을 섭렵했고, 매번 '이세돌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했다. 손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테스트하고 다시 프로토타입을 만들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위즈스톤>이라는 이름으로 3종의 데뷔작이 완성되었다. 그 역사가 바둑의 역사를 따라잡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보드게임 작가 이세돌'의 역사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