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WEBZINE

웹진

표지이야기 - 푸에르토리코 1897
코리아보드게임즈
2024-03-07
2002년 최고의 화제작, 푸에르토리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열린 해로 기억되는 2002년은 우리나라에 독일식 현대 보드게임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가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1995년에 첫선을 보인 <카탄>과 2000년에 첫선을 보인 <카르카손>이 독일이 아닌 다른 국가에 이제 막 독일식 현대 보드게임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리고 있던 때였는데, <카탄>과 <카르카손>은 우리나라의 PC방 문화와 결합하며 보드게임 카페라는 새로운 업종을 탄생시켰다. 보드게임 카페는 독일식 현대 보드게임란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보드게임 카페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독일식 현대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봐야 정말 극소수의 동호인 뿐이었다. 보드게임 카페의 등장 이후 보드게임 동호회의 회원 수는 그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도로 늘어갔고,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보드게임 동호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일식 현대 보드게임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가 본격적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2002년 당시 보드게임 동호회 최고의 화제작은 카리브해의 섬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꾸리고, 각종 건물을 건설하거나 생산된 상품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며 승점을 얻는 보드게임인 <푸에르토리코>였다. <푸에르토리코>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일 최대 보드게임 퍼블리셔인 라벤스부르거의 숙련자용 게임 브랜드 알레아에서 나온 최신작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알레아는 1999년에 <태양신 라>를 첫 번째 게임으로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 브랜드로 2000년에 발매된 <피렌체의 제후>, 2001년에 발매된 <제노바의 상인> 등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숙련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레아 브랜드의 새로운 게임이 발매되었다는 소식에 동호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2002년, 푸에르토리코를 즐기는 모습

다만, 당시에는 한국어판 보드게임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는 보드게임을 판매하는 곳도 극히 제한되었기에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푸에르토리코>는 보드게임 동호회라면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게임으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동호인이 즐겼다.
한국의 보드게임 동호회에서만 <푸에르토리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의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보드게임긱(boardgamegeek.com)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푸에르토리코>를 해보고 난 후에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높은 평가 점수를 주기 시작했고, <푸에르토리코>에 대한 각종 분석과 전략과 전술 팁, 다양한 토론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평가가 점차 누적된 결과, 그 당시에 평점 순위 상위권에 있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엘 그란데>, <피렌체의 제후> 등을 하나씩 제치며 차근차근 평점 순위를 높여갔다. 발매 이듬해인 2003년에 <푸에르토리코>는 마침내 보드게임긱 평점 순위 1위를 차지했다. 간혹 <푸에르토리코>의 자리를 위협하는 게임이 나타나긴 했지만, <푸에르토리코>는 2008년 8월 <아그리콜라>에 의해 1위 자리를 빼앗기기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10년에도 약 반년간 다시 1위 자리를 되찾기도 했다. 아직 어떤 게임도 <푸에르토리코>가 보드게임긱에서 1위를 차지한 기간을 넘어서지 못했을 정도로, <푸에르토리코>는 당대 최고의 게임이었다. 이제 <푸에르토리코>는 1위가 아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게임의 무대가 1897년의 푸에르토리코를 배경으로 바뀌었다. 플레이어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전원 지역을 발전시켜 명성을 떨치기 위한 경쟁을 벌인다.

2022년, 푸에르토리코 1897
<푸에르토리코> 발매 20주년을 맞이하는 2022년에 라벤스부르거는 <푸에르토리코>의 새로운 판본인 <푸에르토리코 1897>을 발매했다. <푸에르토리코 1897>의 기본적인 게임 규칙은 <푸에르토리코>와 같지만, 1897년이라는 특정한 연도를 지정해 이 게임의 시대적 배경과 테마를 바꿨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게임의 무대가 되는 장소가 카리브해에 있는 섬인 푸에르토리코인 것은 같지만, 스페인이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인 16~17세기 무렵이 아닌,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을 약속받고 독립을 준비하던 시기인 1897년으로 그 시대적 배경을 바꾼 것이다. 테마 변경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뒤에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 우선 게임의 진행 방법부터 살펴보자.
플레이어들의 목표는 각자의 개인판으로 표현되는 각자가 맡은 푸에르토리코 전원 지역을 발전시켜 명성을 얻는 것이며, 플레이어들이 얻은 명성은 승점으로 표현된다. 이를 위해 자기 차례인 플레이어는 개척자, 건축자, 모집관, 생산자, 상인, 선장, 탐험가라는 다양한 역할을 중 하나를 선택하며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플레이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역할들. 자기 차례인 플레이어는 이 역할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모든 플레이어가 해당 역할의 행동을 수행하게 된다.

자기 차례인 플레이어가 역할을 선택하면, 그 플레이어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돌아가며 해당 역할의 행동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개척자 역할을 선택했다면, 그 플레이어부터 모두가 개척자의 행동으로써 농장 타일 1개씩을 가져가는 것이다. 단, 그 역할을 선택한 플레이어만 해당 역할의 특별한 혜택을 얻으며, 개척자를 선택한 플레이어가 얻는 특별한 혜택은 나중에 건물을 지을 때의 비용을 줄여줄 채석장 타일을 농장 타일 대신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즉, 게임 중에 개척자 역할을 선택하지 않은 플레이어는 이 채석장 타일을 가져갈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역할은 직간접적으로 푸에르토리코 전원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과 관련 있으며, 역할 선택이 누적되고 플레이어들이 세부적인 선택이 달라짐에 따라 플레이어들의 개인판은 각기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개척자를 선택했다면, 개척자의 특별 혜택을 통해 펼쳐진 농장 타일을 포기하고 채석장 타일을 가져갈 수도 있다.

역할을 선택한 플레이어만이 받는 특별한 혜택과 함께,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요소로는 모든 요소에 수량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에는 상품 4개까지만 판매될 수 있고, 이미 상점에 판매된 것과 같은 종류의 상품은 판매할 수 없다. 가장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인 커피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플레이어도 커피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플레이어보다 먼저 판매할 기회를 잡아야만 커피를 팔고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품을 판매해 돈을 벌고 싶다면,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언제인가를 파악하고, 적절한 순간에 해당 역할을 선택해야만 한다. 이런 제한은 상인 역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역할에도 적용된다. 선장으로 상품을 배에 실어 승점을 얻고 싶어도, 배의 수에 제한이 있으며, 배마다 실을 수 있는 상품 수의 제한이 있어 원하는 대로 상품을 실어 보낼 수 없고, 건축가로 건물을 짓고 싶어도 각 건물마다 건물마닫 수량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늦으면 원하는 건물을 짓지 못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어떤 역할을 선택하느냐와 그 역할을 선택하는 순서로 인해 각 플레이어의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상품을 상점에 팔거나 배에 실을 때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기에, 필요한 역할을 누가 선택해서 누가 행동을 먼저 하는가에 각자 다른 결과 값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들은 서로 밀접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게임 속에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과정을 보자. 상품 하나를 생산하려면 해당 상품의 농장 타일과 이를 가공하는 생산 건물 모두에 쌍을 이뤄 일꾼이 배치돼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설탕 농장 타일과 설탕 공장에 각각 일꾼이 하나씩 배치돼야 설탕 1개가 생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척자를 통해 원하는 농장 타일을 가져와야 하며, 건축가를 통해 해당 작물의 생산 건물을 지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집관을 통해 이들 모두에 일꾼을 배치해야 한다. 그런 일련의 행동이 선행된 뒤에야 생산자를 통해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상품은 선장의 행동을 통해 수출을 위한 배에 싣고 승점을 얻을 수도 있고, 상인의 행동을 통해 상점에 팔고 돈을 벌 수도 있다. 이렇게 마련된 돈은 건축가의 행동으로 건물을 지을 때 사용되며, 지은 건물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또 다른 상품이 생산될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각 역할의 행동에 부가적인 이득을 더해준다. 게다가, 건물은 자체적으로 승점을 가지고 있다. 게임에서 승점을 얻는 방법은 건물을 짓는 것과 상품을 배에 실어 보내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쪽으로나 결국에는 상품이 필요한 것이다.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플레이어보다 더 많은 승점을 얻어야 하는데,이 두 가지 방법,즉 건물 건설과 상품 수송 중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가, 그리고 이 두 방법간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전략이 갈린다.

설탕 농장 타일 4개와 두 개의 설탕 공장의 4칸 모두에 일꾼이 배치돼 있고, 담배 농장 타일 1개와 담배 공장 1칸에 일꾼이 배치돼있고, 옥수수 농장 타일 2개에 일꾼이 배치돼 있기에 누군가 생산자를 선택하면 설탕 4개, 담배 1개, 옥수수 2개가 생산될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1897>에서 무작위적인 요소는 개척자 단계에서 가져갈 농장 타일이 어떤 것이 펼쳐지느냐 하는 것 하나밖에 없고, 다른 모든 요소는 플레이어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각 플레이어가 어떤 전략을 세웠는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순서에 따라 역할을 선택했는가에 따라,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선택한 역할로 인해 얻은 특별한 혜택에 따라 게임의 진행 양상이 달라진다. 적절한 역할을 선택함에 따라 자신의 전략을 우직하게 실행시켜 나갈 수도 있지만, 역할 선택을 통해 상대의 계획을 간파하고 견제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단기적인 이득에 집중할 것인가,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할 것인가와 같은 가치판단에 따라 역할 선택에 희비가 갈리는 것이 이 게임이 지닌 매력이다.
이와 더불어, 게임의 종료 조건도 흥미롭다. 선장 행동에 필요한 승점 토큰이 다 떨어지거나, 모집관 행동에 필요한 일꾼이 충분하지 않거나, 누군가 자기 건물 칸을 건물로 가득 채우면 진행 중인 라운드까지만 하고 게임이 종료된다. 게임 종료 조건은 누가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가에 영향을 받으며, 플레이어마다 어떤 조건으로 게임을 끝내는 것이 유리한가 하는 점이 달라진다. 이런 점은 항상 한두 차례를 더 진행했다면 게임의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함께 선사하며, 게임을 마칠 때마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최종 승자는 결국 1명이겠지만, 각자 자신의 전략과 계획을 통해 개인판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적지 않은 만족감을 제공한다. 이런 모든 점이 어우러지며 <푸에르토리코>는 오랜 기간 동안 보드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으며, <푸에르토리코 1897>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1897의 다양한 건물들. 기존에 이름과 기능만 표시하던 타일에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 추가됐다.

게임 테마의 변경
마치기 전에 테마의 변경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식민지 경영이라는 기존 테마에 대한 작가와 퍼블리셔의 무신경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2년이라는 때가 독일에서만 소비되던 보드게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실제 푸에르토리코 거주민이 보기에 불쾌한 역사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 부분은 농장과 건물에서 일할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기에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푸에르토리코 거주민이 아닌 배를 타고 건너온 '이주민'이라는 점이었다. 이주민은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을 의도했을 수도 있지만, 플랜테이션 노동자로서 노예 노동이 사용되었던 역사와 결합하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묘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불만이 받아들여져, 20주년을 기념하는 2022년에 <푸에르토리코 1897>로 변경되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1897년은 이미 노예 노동은 폐지된 시점이자,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을 약속받은 시기였기에 테마와 시대적 배경을 바꾼다고 했을 때 매우 적절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푸에르토리코 1897에 추가된 작은 확장 4종

<푸에르토리코 1897>의 변경은 게임의 시대적 배경과 테마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게임의 그래픽이 모두 바뀌었다는 것이다. 건물의 이름과 기능만 표시되었던 건물 타일이 해당 건물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바뀌며, 시각적인 만족감을 높였다. 이와 더불어, <푸에르토리코>가 발매된 이후 소개된 작은 확장 4종을 모두 포함하며 게임 내적으로도 풍성해졌다. 과거의 기념판과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푸에르토리코 1897>은 충분히 20주년을 기념하는 판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1897>을 통해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는 명작 보드게임을 경험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