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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1897, 게임의 배경 이야기
코리아보드게임즈
2024-01-24
<푸에르토리코 1897> 규칙서에서 게임의 배경에 대한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보드게임에 담긴 역사 이야기
<푸에르토리코 1897>은 20세기에 접어들던 무렵 푸에르토리코 섬의 문화로부터, 그리고 이 땅을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게임입니다. 여러분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이 섬의 농장을 운영하며 부와 명예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근대화하는 세계 속에 독자적인 지위를 굳게 세우려 노력할 것입니다. <푸에르토리코 1897>은 이 섬의 역사에 그 근간을 깊게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상을 완벽하게 반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푸에르토리코의 따스하고 정겨운 지역 문화와 더불어 당대의 기업가 정신에 가능한 한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습니다. 끝으로, <푸에르토리코 1897>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푸에르토리코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스스로 찾아 보도록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하의 내용은 게임을 관통하는 테마나 운용 방식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몇 가지 관점,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위치와 깃발

역사적 배경
1492년보다 이전에, 푸에르토리코섬에서 수백 년간 거주해 온 원주민 타이노족은 이 섬을 보리켄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럽에서 온 방문자들을 처음 마주한 타이노족은 저들을 두 팔 벌려 반겼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재물에 눈이 멀어 찾아온 스페인 침략자(콩키스타도르)들이 끌어들인 대규모 군세와, 생소한 질병과, 그들로 인한 온갖 고통으로 인해 원주민들은 대대적으로 혹은 완전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 역시 이 섬으로 몰려들어 왔지만, 이는 자발적으로 탐험하여 온 것이 아닌 노예로 끌려온 것으로, 급격하게 줄어드는 타이노족 수로 인한 노동력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격동의 용광로 속에서 문화, 종교, 생활 양식 등이 뒤섞여 오늘날 우리가 푸에르토리코라 부르는 혼합주의적 결과물이 태어나게 됩니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에 내재되어 있는 표현 양식의 문화적 형태(음악, 언어, 종교, 미술, 음식 등)는 타이노족과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문화적 전통에 기인하는 셈입니다.
식민지가 되어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대부분 동안, 스페인은 이 섬을 군사적, 전략적 관점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성과 요새 등의 방어 시설을 축조하여 프랑스나 네덜란드 및 다른 열강으로부터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많은 주요 도시들이 이 시기에 세워졌음에도, 이 섬의 내정 상황은 여전히 등한시된 채였습니다. 이로 인해 히바로(Jíbaros)라 불리는 시골 지역 주민들은 담배, 옥수수, 쌀, 감귤류 같은 작물을 재배하며 자급자족의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 농산물과 다른 상품들을 이용해 스페인 사람들 및 다른 상인들과 교역을 하며 지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스페인 정부는 토지 재분배 제도와 같은 안건을 일부 통과시키며 유럽인의 이주 정책에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많은 농지가 당시 대세 수출 품목이었던 커피와 설탕을 생산하는 상업형 농업에 사용되었습니다. 설탕 산업은 특히 대규모의 부지와 노동력과 자본을 필요로 했기에, 플랜테이션 농장주는 계속해서 공급되는 아프리카 원주민 노예들을 섬으로 들여와서 갈수록 늘어나는 식민 농장의 사탕수수 작업량을 처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노예들의 반란이 잦아졌고, 급기야 1821년에는 ‘마르코스 시오로’가 일으킨 가장 유명한 봉기가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순식간에 진압된 사건이었지만, 푸에르토리코 대내외적으로 사회적 압력이 고조되어 마침내 1873년, 명목상이나마 노예 제도가 영원히 철폐되는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최초의 깃발로 알려진 그리토 데 라레스 때 사용된 혁명기(왼쪽 위)와 1895년부터 사용된 푸에르토리코 깃발

스페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서반구 식민지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스페인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악화되는 경제 상황과 끝나지 않는 압제에 항거하여 1868년 ‘그리토 데 라레스(라레스의 외침)’와 같은 봉기를 일으켜 저항했습니다. 1897년, 결국 스페인은 다방면에서 가해지는 정치적 압박에 무릎을 꿇고 푸에르토리코 자치 헌장(Carta Autonómica)을 승인하게 됩니다. 푸에르토리코에 있어서 1897년은 100년이 넘는 격변의 시기 끝에 맞이한 순간이자, 당시의 중대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맞닥뜨리면서도 미래를 바라보며 독자적인 지위에 오를 준비를 갖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1897년 이후 푸에르토리코 농부들의 역할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푸에르토리코가 짧은 기간에 자치권을 얻어냈음에도,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의 정치 제도가 새롭게 갖춰지는 중에, 1898년에 벌어진 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게 할양하고 맙니다.
20세기에 푸에르토리코가 이룩한 발전에 대해, 많은 역사책에서는 이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보조했던 미국의 역할에 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1897>은 미국령이 된 것에 따른 장단점을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관점을 들여다 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푸에르토리코의 농부들, 그리고 자신들의 섬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도맡았던 중요한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농부들은 작물을 기르고 파는 것 이상으로 많은 과업을 이루었습니다. 조합을 설립하여 서로를 지원하고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필요한 선진 기술을 연구하고, 확보하고, 활용했습니다. 또한 스스로 선거 운동을 벌여 지역 사회 정치를 통해 가격을 규제하고 신용 대출을 용이하게 하는 등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일부 농업인은 신흥 경제 체계를 받아들여 매년 되풀이되는 부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더욱 부유해진 이들은 금융업자가 되거나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판매하며 이윽고 지역 사회에서 저명한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재배 작물


담배는 1897년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물이었습니다. 이 게임에서는 두 번째로 값진 작물이지만 말입니다. 사탕수수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에도 불구하고('가난한 자의 작물'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를 재배하는 것이 지역 지주로서의 지위를 다지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초기 투자에 필요한 자본금이 적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잇따랐습니다. 담배는 제철에 재배하는 작물이어서, 농부들은 창고를 다각화하여 판매 및 생계용 작물을 추가로 재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농촌 가구와 지역 사회에 다방면으로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응집력과 정치적 참여를 북돋았습니다.
사탕수수와 커피는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로 가치 있는 작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이 작물들을 키우려면 많은 자원을 소비해야 했기에, 이들은 주로 더 큰 농장에서 재배되는 경향이 컸습니다. 이 게임에서 이 작물들을 다루는 것은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이 3가지 작물을 판매하면서 크게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사탕수수가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값진 농산물이었으나, 게임에 적용된 가치 체계로는 1920년대의 현실이 반영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담배가 푸에르토리코 전체 작물 거래량 중 38%를 기록하면서, 25%를 기록한 사탕수수를 가볍게 제쳤습니다.
상인이라는 역할을 게임 내에 구현할 때, <푸에르토리코 1897>은 상점의 시세를 고정하여 게임 진행을 훨씬 쉽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별 상품의 가격이 시시각각으로 변동했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의 수요, 공공 정책, 관세, 농업 조합이 행사하는 영향력 등 다양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건물
푸에르토리코의 독자적인 담배 농장은 역사적으로 시골 지역이었던 동부와 서부의 산간 지방에 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1897년에는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지방과 도시 사이를 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를 거치면서, 푸에르토리코는 교통과 무역이라는 2가지 면에서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연결해내는 수단을 개발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1897>의 10주화짜리 건물들은 1897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여 실재해 온 역사적 장소를 나타내고 있으며, 오늘날 실제로 여행을 통해 방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시청' - 산후안의 라 포르탈레자

'요새' - 산후안의 엘 모로

'세관' - 산후안의 아두아나

'소방서' - 폰세의 파르퀘 데 봄바스

'주거지' - 폰세의 레지덴시아 수비라

'대성당' - 폰세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

'기념물' - 우마카오의 후마카오 추장의 동상

'마을 광장' - 산세바스티안의 광장

농부와 노동자
<푸에르토리코 1897>의 상자 표지와 개인판에 그려진 삽화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푸에르토리코에서 살펴볼 수 있는 연령, 성별, 인종의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1897년에는 인구의 절반이 백인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유색 인종(주로 아프리카계와 원주민 혈통)이었습니다.
개인판은 의도적으로 남성과 여성 인물이 보이는 면으로 구분했습니다. 여성도 종종 남성과 마찬가지로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일부 여성들은 심지어 개인 농장을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농장에서는 모두가 함께 일을 거들었습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푸에르토리코 문화 중 하나가 바로 ‘아부엘리타(Abuelita)’, 즉 할머니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비록 더 이상 농장 일을 직접 거들 수는 없는 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받들어 모시는 존경의 대상입니다. 일꾼 토큰도 푸에르토리코에서 살며 일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측면에서 개인판 초상화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는 항상 농장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장려되었습니다.


또한, 농장 노동의 대부분은 품삯과 먹을 것을 얻으러 전 세계에서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해 온 수많은 임금 노동자들이 수행했습니다. 물론 실제 일꾼들은 급료를 받고 일했지만, <푸에르토리코 1897>에서는 게임을 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규칙상 임금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변형 규칙을 만들어 가며 임금을 계산하여 게임을 즐겨 보시기를 권합니다. 푸에르토리코 농장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이 비록 길고 고되긴 하지만, 매우 가치 있고 대우받는 일이라는 현실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