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러스한 게임을 만드는 작가, 카스퍼 랍

플레이어가 허점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게임을 디자인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요약정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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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4

#카스퍼 랍

#매직 메이즈

#다섯 개의 탑

#모자가 아니잖아

#띵

작품에 작가가 있듯, 보드게임도 그 규칙을 만드는 작가가 있습니다. 게임의 시스템을 그려내는 사람으로서 디자이너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보드게임에서 작가의 존재는 참 눈에 띄지 않는 듯합니다. 우베 로젠베르크, 라이너 크니치아, 비탈 라세르다처럼 널리 알려진 작가 외에도 재미있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는 작가들이 있으며, 한 작가의 작품을 쭉 훑어보는 것도 충분히 흥미로울 겁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카스퍼 랍은 덴마크 작가입니다. 작가는 정식 퍼블리싱을 할 수준의 게임을 만들기 전까지 취미로 게임을 디자인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품 목록이 적지 않은데, ⟨매직 메이즈⟩의 시리즈를 제외한 게임들을 살펴보면 각종 보드게임상에서 후보로 올랐거나 수상까지 한 게임이 무려 8가지나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게임 중 아래 4가지 게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합니다.

 

※ 각 게임 상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소개글로 연결됩니다.

 

 

매직 메이즈(2017, 만 8세 이상, 1~8명, 15분)

#협력 #17가지_미션_시나리오 #의사소통_불가 #독일_올해의_게임상_후보

시나리오에 정해진 내용에 따라 모험가 말을 다 함께 조종해서 쇼핑몰을 탐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플레이어마다 각 말에게 시킬 수 있는 행동이 서로 다릅니다. A는 어느 말이든지 상관없이 동쪽으로만 보낼 수 있고 B는 서쪽으로만 보낼 수 있죠. 이런 식인데, 서로 직접적인 의사소통 없이 각 말이 동분서주하게 할 수 있을까요? 좌충우돌 엉망진창 모험담이 펼쳐집니다!

 

다섯 개의 탑(2023, 만 7세 이상, 2~5명, 15~30분)

#경매 #세트_모으기

매 차례 다섯 장의 카드가 펼쳐집니다. 순서대로 돌아가며, 가장 높은 숫자를 부른 플레이어가 그 장수만큼 카드를 가져가 자기 탑을 쌓아 올려야 합니다. 반드시 더 높은 숫자 카드 위에 낮은 숫자를 올려야 하니 낮은 숫자 카드는 천천히 가져오면 좋겠지만, 적은 숫자를 부르면 남이 카드를 가져가서 아예 아무것도 못 먹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높은 탑을 쌓고 탑 꼭대기까지 잘 올리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2024, 만 8세 이상, 2~7명, 10분)

#원카드 #관찰력 #순발력 #파티스러운

자기 차례가 되면, 가운데에 나온 카드와 숫자나 색깔이 일치하는 카드를 1장씩 내면서, 손에 든 카드를 가장 먼저 다 내면 승리합니다. 흔히 아는 ⟨원카드⟩ 규칙이죠? 그런데 카드마다 가운데에 적혀 있는 상황(누군가가 휴대폰을 볼 때, 누군가가 몇 시인지 물어본다면 등등)이 발생하면 카드를 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남의 차례에도요! 매의 눈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며 기회를 노리세요!

 

모자가 아니잖아(2023, 만 8세 이상, 3~8명, 15분)

#기억력 #블러핑 #카드게임 #독일_올해의_게임상_후보 #골든긱_최고의_파티게임상_수상

처음 카드를 가져올 때는 그림을 똑똑히 봅니다. 이제 카드를 뒤집고, 화살표에 나오는 방향으로 그 카드를 옆 사람에게 주면서 카드 이름을 말합니다. 카드를 받은 사람은 원래 갖고 있던 카드를 역시 뒷면 화살표 방향으로 주면서 그 카드 이름을 말합니다. 카드들이 하나하나 뒷면으로 뒤집히고, 좌로 우로 오가다 보면 무슨 카드가 무슨 카드인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 겁니다. 과연 나에게 카드를 준 사람의 말이 맞을까요? 의심스러우면 카드를 공개하고, 틀린 사람이 벌점으로 가져갑니다. 벌점을 적게 먹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취미로 게임을 만들던 작가가 상업 작가 궤도에 올라서는 계기가 된 게임은 바로 ⟨매직 메이즈⟩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 목록에는 ⟨매직 메이즈 키즈⟩를 비롯한 매직 메이즈 시리즈 게임이 제법 많습니다. ⟨매직 메이즈⟩가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지, 작가가 이 게임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죠. ⟨매직 메이즈⟩와 관련된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플레이어들이 게임 말을 다 함께 협력해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관한 보드게임을 공모전용으로 구상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게임(silly game)을 상상했다고도 했죠.

 

작가의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작가의 게임들에서는 바로 그런 우스꽝스러움, 즉 유머 감각이 느껴집니다. 카스퍼 랍 작가의 적지 않은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완벽한 플레이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플레이어가 허점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웃음이 터집니다. ⟨띵⟩에서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각종 조건을 다 외워 피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모자가 아니잖아⟩에서는 전체 카드를 외우기는커녕 방금 보고 뒤집은 카드 1장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매직 메이즈⟩에서는 동시에 4개의 말을 다 추적하며 내가 움직여야 할 차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남과 말로 소통도 못 하는 상황이라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게임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어떤 식으로 극복할까요?

 

 

 

띵에서는 다른 플레이어가 카드에 나오는 상황을 만들게끔 유도해도 됩니다. 단순 관찰을 넘어서서 좀 더 적극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 더 재미있습니다.

 

 

⟨띵⟩에서는 플레이어의 평범한 행동이 상대에게 카드를 낼 기회를 주는 실책이 되는데, 실제로 게임을 해 보면 남이 “띵!”을 외칠 기회를 미연에 차단하는 건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을 계속 관찰하며 내가 “띵!”을 외칠 기회를 찾아내게 되죠. 사실 딱히 게임에서 금지하는 걸 건드리는 ‘실수’를 하는 것도 아닌데도 실책이 되는 상황 자체가 우스꽝스럽지만, 그걸 즐기면서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악착같은 플레이가 색다른 재미를 줍니다.

 

 

 

왼쪽 플레이어가 카드 한 장을 화살표 방향 옆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카드 위에 받은 카드를 놓고, 헤드폰을 뒤집어 옆사람에게 줄 겁니다. 당장 두세 명만 거쳐도 헤드폰의 위치는 기억이 나지않을 거고,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모자가 아니잖아⟩에서는 카드를 뒤집고 한두 장만 넘겨도 기억이 싹 사라지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담대한 배짱이 필요합니다. 당장 내 카드가 기억나지 않아도 “이거 모르겠어”라고 하지 않고, 일단 지금까지 나왔던 카드 중 뭔가를 외치고 보는 거죠. “모자를 선물로 줄께”라고 상대에게 당당하게 말하면서 내미는데, 나도 상대도 그 카드가 모자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 상황이 그 자체로 우스꽝스럽습니다. 또한 카드를 공개하게 될 경우, 내가 대충 부른 그 물체가 정말로 그 카드에 그려져 있다면 한 번 더 빵 터지는 게 또 묘미입니다.

 

 

 

이제 빨간 말만 출구로 나가면 되는데 모래시계가 다 떨어져 갑니다. 모래시계 뒤집기 기호로 가려면 위로 한 칸 왼쪽으로 두 칸을 가야 하겠네요. 위로 보내기 행동을 가진 플레이어가 눈치껏 먼저 빨간 말을 위로 보내고, 그런 뒤 왼쪽으로 보내기 행동을 가진 플레이어가 얼른 나서야 할 텐데요!

 

 

⟨매직 메이즈⟩는 제한 시간 내에 4개의 말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임무를 달성해야 하는 협력 게임입니다.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전제 조건 자체가 아주 강력하기에, 플레이어는 그 이외에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됩니다. 필요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끌고 가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완벽한 플레이는커녕 이게 되나 싶을 정도로 엉망으로 움직입니다. 그 실수투성이 과정이 웃기고, 그럼에도 성공하게 되면 기뻐지는 게임이죠.

 

 

 

탑은 기본적으로 숫자 내림차순이 되게끔 위에 카드를 붙여야 합니다. 이미 탑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가운데에 펼쳐진 5장의 카드 중에 가져올 수 없는 카드가 정해지기도 합니다. 탑 맨 위에 너무 낮은 숫자가 게임 초중반에 놓이면 곤란해지는데, 그렇다고 낮은 숫자를 무조건 패스하기에는 좋은 숫자도 못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조바심에서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2023년, ⟨모자가 아니잖아⟩를 출시한 해에 나온 또 다른 작품인 ⟨다섯 개의 탑⟩은 다른 작품들과는 좀 색다릅니다. 이 게임은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플레이어 개개인의 정보나 성향 측면에서 상호작용이 강하게 이루어지는 소셜 게임 스타일도 위에 언급한 게임들보다 약합니다. 대신 ⟨다섯 개의 탑⟩은 선택의 딜레마를 크게 가져갑니다.

 

점수를 내려면 카드를 가져와야 하는데, 카드를 자기 앞에 놓는 데 제약이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보다 많은 개수로 카드를 가져올 수 있어야 점수를 조금이라도 얻으므로, 기회가 될 때 무리해서라도 카드를 가져오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다 잘못되면 이후 경매에서 내내 높은 숫자를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지만요. 이 “아예 못 먹느니 차라리 별로인 카드도 가져가겠다”의 선택은 작가 특유의 ‘완벽하게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에 가깝지만, 그것을 플레이어의 선택과 카드 운에 맡긴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표지만 봐도 분위기가 감이 오는 카스퍼 랍 작가 게임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봐도, 이 작가는 자기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기를 추구하는 듯이 보입니다. “가장 완벽한 낮잠 시간은?” 같은 질문에 답변을 각자 비공개로 쓴 뒤 숫자 오름차순으로 나열하는 협력 게임 ⟨펀 팩츠⟩, ⟨매직 메이즈⟩처럼 말없이 다 함께 정원 타일을 규칙대로 정렬해야 하는 실시간 협력 게임 ⟨가드너스⟩, 카드를 낼 때마다 규칙이 하나씩 더해지는 가운데 모든 규칙을 마지막까지 틀리지 않고 수행하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아우어 시크릿 소사이어티⟩까지. 어쩌면 작가의 성격 자체가 가볍고 유쾌해서 이렇게 통통 튀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게임을 꾸준히 뽑아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듣기 전까지는 미처 예상도 못 할 만큼 제각각이 이색적인 게임을 꾸준히 디자인해 온 카스퍼 랍 작가의 다음 게임은 또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해집니다. 이다음 언젠가는 독일 올해의 게임상 수상작까지 만들어내지 않을까요. 작가의 유쾌한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좋은 작품을 기다려 봅니다. 물론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도 여러 보드게임상 후보에 오를 만큼의 저력이 있으니, 하나하나 즐겨보셔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입니다. 특히 플레이어가 허점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즐길 수 있는 분이라면 마음에 쏙 들 테고요.

 

 

 

※ 작가 인터뷰 참고 원문: https://www.mojo-nation.com/kasper-lapp-origins-spiel-de-jahres-nominated-magic-maze-game-played-total-silence/

 

신성현(evern4ever@koreaboardga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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